당신 참 시다, 詩다 / 서하
입속에서 터져버린 고백이 샐까봐 아무 말 못하겠다
다 빼앗기더라도 마음만은 뺏기지 말라는 뜻을
가지가지에 붉게 매달고 상화 고택 가는 길가에
청사초롱 밝혀 든 석류나무 한 분
불을 바라보는 나와 나를 바라보는 불빛이
약속도 없이 우연히 만난 첫사랑처럼 아득하다
세상에 없는 애인은 어디로 갔고
저 불빛은 어디서 왔나
석류 위에도 석류
석류 아래에도 석류
석류 어깨에 걸린 시린 사랑 길 잃을까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지나가는 저 여자
끌어당기지 않아도 늘어난 석양처럼 눈자위기 붉다
참 난처해라
오늘도 어제도 끝내 터뜨리지 못하고
입속에 차오르는 이름으로 침이 한가득 고이는지
그림자 입에 넣고 굴리다 사리 같은 별 툭툭 내뱉는 밤
당신 참 시다, 詩다
*출처: 서하 시집 『먼 곳부터 그리워지는 안부처럼』, 시인동네, 2020.
*약력: 1961년 경북 영천 출생(女), 1999년 《시안》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식초나 설익은 살구 맛 같은 '시다'라는 형용사가 '詩'가 되었다.
화자는 입속에서만 터져버리고 마는 석류처럼 끝내 고백하지 못하였다.
"사리 같은 별 툭툭 내뱉는 밤", 입속에서만 차오르는 “당신 참 시다, 詩다.”
결국 사랑의 고백과 詩도 시큼한 맛이 있어야 한다고 노래하는 것이 아닐까.
입속에 침이 계속 고이게 되는 독특한 감정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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