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당신 참 시다, 詩다 / 서하

믈헐다 2022. 10. 14. 00:17

당신 참 시다, 詩다 / 서하

 

​입속에서 터져버린 고백이 샐까봐 아무 말 못하겠다

 

다 빼앗기더라도 마음만은 뺏기지 말라는 뜻을

가지가지에 붉게 매달고 상화 고택 가는 길가에

청사초롱 밝혀 든 석류나무 한 분

 

​불을 바라보는 나와 나를 바라보는 불빛이

약속도 없이 우연히 만난 첫사랑처럼 아득하다

 

​세상에 없는 애인은 어디로 갔고

저 불빛은 어디서 왔나

 

​석류 위에도 석류

석류 아래에도 석류

 

​석류 어깨에 걸린 시린 사랑 길 잃을까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지나가는 저 여자

끌어당기지 않아도 늘어난 석양처럼 눈자위기 붉다

 

참 난처해라

오늘도 어제도 끝내 터뜨리지 못하고

입속에 차오르는 이름으로 침이 한가득 고이는지

 

​그림자 입에 넣고 굴리다 사리 같은 별 툭툭 내뱉는 밤

 

당신 참 시다, 詩다

 

*출처: 서하 시집 먼 곳부터 그리워지는 안부처럼, 시인동네, 2020.

*약력: 1961년 경북 영천 출생(), 1999시안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식초나 설익은 살구 맛 같은 '시다'라는 형용사가 '詩'가 되었다.

화자는 입속에서만 터져버리고 마는 석류처럼  끝내 고백하지 못하였다.

"사리 같은 별 툭툭 내뱉는 밤", 입속에서만 차오르는 “당신 참 시다, 詩다.”

결국 사랑의 고백과 詩도 시큼한 맛이 있어야 한다고 노래하는 것이 아닐까.

입속에 침이 계속 고이게 되는 독특한 감정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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