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나비처럼 잠들다 / 우남정

믈헐다 2022. 12. 12. 03:40

나비처럼 잠들다 / 우남정

 

겨울이 한걸음 빨라졌습니다

그 걸음에 맞춰 옷가지들을 정리합니다.

 

재킷과 블라우스, 몇 개의 스커트와 바지

한철을 연출한 가난한 소품들

곤곤함이 배어든

유행과 거리가 먼 그런 옷들입니다

 

해를 넘기며 더러는 허리를 늘리고

단추를 옮겨 달고

어울리지 않을 것들과 섞여

시간을 견딘 것들

몇 가지는 솎아 내고 갈무리합니다

 

다시는 입을 것 같지 않은데

끝내 버리지 못하는 오랜 슬픔이 있습니다

올해도 우두커니 옷장에 서 있었어요

만지작거리자, 손끝에서 온기가 피어납니다

 

소매 끝에서 가만히 번져오는 모과 향기

사드락사드락 첫눈 내리는 소리

손발 시린 쓸쓸함도

곱게 접어 상자에 넣었습니다

 

두 소매를 가지런히 앞으로 모은 채

허리를 반으로 접은 보랏빛 재킷 한 장이

나비처럼 잠들었습니다

 

*출처: 우남정 시집 뱀파이어의 봄, 찬년의시작, 2022.

*약력: 1953년 충남 서천 출생(,)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사진은 2018년 개봉작 '나비잠' 티저 포스터)

 

시인의 이름만 보면 언뜻 남성으로 착각할 수 있으나 

옷가지를 정리하는 품새가 여느 주부와 다름이 없다.

화자는 겨울 걸음에 맞춰 옷장을 정리하다가 옷가지에 담긴 추억을 회상한다.

다시는 입을 것 같지 않은데도 끝내 버리지 못하는 오랜 슬픔과

옷을 만지작거리니 옷소매 끝에서 모과 향기가 가만히 번져오기도 한다.

두 소매를 가지런히 앞으로 모은 채 허리를 반으로 접어 나비처럼 잠든

보랏빛 재킷의 아름다운 추억을 고이고이 간직하고 싶었을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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