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처럼 잠들다 / 우남정
겨울이 한걸음 빨라졌습니다
그 걸음에 맞춰 옷가지들을 정리합니다.
재킷과 블라우스, 몇 개의 스커트와 바지
한철을 연출한 가난한 소품들
곤곤함이 배어든
유행과 거리가 먼 그런 옷들입니다
해를 넘기며 더러는 허리를 늘리고
단추를 옮겨 달고
어울리지 않을 것들과 섞여
시간을 견딘 것들
몇 가지는 솎아 내고 갈무리합니다
다시는 입을 것 같지 않은데
끝내 버리지 못하는 오랜 슬픔이 있습니다
올해도 우두커니 옷장에 서 있었어요
만지작거리자, 손끝에서 온기가 피어납니다
소매 끝에서 가만히 번져오는 모과 향기
사드락사드락 첫눈 내리는 소리
손발 시린 쓸쓸함도
곱게 접어 상자에 넣었습니다
두 소매를 가지런히 앞으로 모은 채
허리를 반으로 접은 보랏빛 재킷 한 장이
나비처럼 잠들었습니다
*출처: 우남정 시집 『뱀파이어의 봄』, 찬년의시작, 2022.
*약력: 1953년 충남 서천 출생(女,)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시인의 이름만 보면 언뜻 남성으로 착각할 수 있으나
옷가지를 정리하는 품새가 여느 주부와 다름이 없다.
화자는 겨울 걸음에 맞춰 옷장을 정리하다가 옷가지에 담긴 추억을 회상한다.
다시는 입을 것 같지 않은데도 끝내 버리지 못하는 오랜 슬픔과
옷을 만지작거리니 옷소매 끝에서 모과 향기가 가만히 번져오기도 한다.
두 소매를 가지런히 앞으로 모은 채 허리를 반으로 접어 나비처럼 잠든
보랏빛 재킷의 아름다운 추억을 고이고이 간직하고 싶었을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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