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말의 폭우 / 이채민

믈헐다 2022. 12. 20. 23:24

말의 폭우 / 이채민

 

말을 끌고

굴곡진 말의 언덕을 넘는다

선을 넘어서

넘어가고 넘어오는 말

 

주어가 생략된 동사 형용사가

앞이 보이지 않는 해일을 일으키며 질주한다

 

위태로운 바다는 그대로 위태롭고

깨진 화분은

그대로 화분의 이력이 된다

 

바닥인 말을 만나러 부스럭거리는

새벽은

얼마나 부끄러울까

 

그을리고 깨진 말의 폭우 속에서

맹렬하게 자라나는

가시 꽃은

절망보다 위태롭다

 

*출처: 이채민 시집 까마득한 연인들, 현대시학사, 2022.

*약력: 1957년 충남 논산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백 년 만에 핀다는 '가시연꽃'을 홍성군에서 인위적으로 발아 시킴 / 꽃말은 그대에게 행운과 감사)


소리는 같으나 뜻이 다른 단어를 '동음이의어'라 한다.

'말'이라는 단어는 수 개가 있으나, 이 시에서는 입으로 내뱉는 소리를 가리킨다.

우리는 때론 남을 비방하거나 헐뜯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을 때도 있다.

선을 넘나드는 말, 주어가 생략된 말 따위는 위태롭기 짝이 없다.

"그을리고 깨진 말의 폭우 속에서 / 맹렬하게 자라나는 / 가시 꽃은 / 절망보다 위태롭다"

화자는 말밑천이 바닥났으니 새벽녘이면 새로운 말(단어)을 만나러 간다.

어제오늘 폭우처럼 내뱉은 수많은 말들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새벽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