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크리스마스 / 노준옥
바슐라르를 읽다가 갑자기 부엌으로 가서
김장김치 한 포기를 썰지도 않고 죽죽 찢어 서서 먹는다
입안에 가득 한겨울 시린 배추밭이 들어온다
새파란 무우청 줄지어선 무밭도 들어오고
붉은 고추밭도 총총한 마늘밭도 다들 살아서 들어온다
어쩌구저쩌구 고매한 정신에 밑줄 따라 그어가며
한량없이 쫓아가던 나의 정신에 느글거리던 이론에
과감히 고춧가루를 뿌리는 이 한밤의 역설
허구에 시달리며 또한 허구에 목마른 나는
이 긴긴 동짓달 하룻밤을 아름다운 사색으로 채우려 했건만
나의 정직한 식욕은 실체를 원했던 것이다
시뻘건 고춧가루와 노오란 마늘과 시퍼런 파와 청각과 가지가지의 재료들이
망상과 그리움과 고단함과 분노와 욕망과 회환과 무료함과 간절함과
익어가는 여인의 허연 장딴지 같은 배추의 속살에 범벅이 되어
불현듯 아름다워진 나의 크리스마스 저녁
바슐라르선생
꿀꺽 침을 삼키며 날 쳐다보고 있다
*출처: 노준옥 시집 『모래의 밥상』, 시와사상사, 2011.
*약력: 1957년 부산출생(女,) 단국대 영문과 졸업, 2001년 계간 《시와사상》으로 등단.
디지털 시대인 지금보다 아날로그 시대인 예전에는 더 이랬을 것이다.
책을 보다가 글귀가 마음에 들면 밑줄을 쭉쭉 그어 가며 읽었을 테니 말이다.
화자는 크리스마스 저녁에 '바슐라르'를 읽다가 갑자기 허기가 지는 바람에
김장 김치 한 포기를 죽죽 찢어 선 채로 먹으면서 아기 예수와 함께 시 한 편을 탄생시켰다.
"바슐라르의 느글거리던 이론에 과감히 고춧가루를 뿌리는 한밤의 역설"이다.
"익어가는 여인의 허연 장딴지 같은 배추의 속살에 범벅이 되어 / 불현듯 아름다워진 나의 크리스마스 저녁"
이 구절에 바슐라르 선생도 화자를 쳐다보며 꿀꺽 침을 삼킨다니 더없이 아름다운 밤이지 않은가.
*참고
'가스통 루이 피에르 바슐라르(Gaston Louis Pierre Bachelard, 1884~1962)'는 과학, 시, 교육, 시간에 관한 철학을 연구한 프랑스의 철학자.
'김장김치', '무우청', '어쩌구저쩌구', '노오란'은 시적 표현일 뿐,
'김장√김치', '무청', '어쩌고저쩌고', '노란색' 또는 '노란빛'이나 '노랑'이 바른 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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