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 / 김광규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꿋꿋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출처: 김광규,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학과지성사, 1979.
*약력: 1941년 서울 출생, 서울대 및 동대학원 독문과 졸업, 독일 유학 후 서울대 문학박사 학위.
이 시를 통해 자신의 묘비명에 대해 잠시 생각하게 한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면 사람은 저마다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원한다.
결국 화자는 묘비명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총체이자 기억이기에
죽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현실과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화두를 던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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