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봄비 / 고정희

믈헐다 2023. 3. 19. 03:15

봄비 /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출처: 고정희 시집 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사, 1987.

*약력: 고정희(高靜熙) 1948년 전남 해남 출신, 한국신학대학 졸업, 1991 6 9일 지리산 뱀사골 계곡에서 폭우로 불어난 급류에 휩쓸려 세상을 떠났다.

 

 

봄비는 생명이고 기다림이며 희망이다.

봄비는 꼭 필요한 때 알맞게 내리는 비이기에 풍년을 예고하는 단비라고 한다.

봄비로 말미암아 가문 대지의 숨결과 이 땅에 살아가는 뭇 생명의 생기도 살아난다.

생명을 잉태하는 초목뿐 아니라 겨우내 움츠렸던 사람들도 봄비에 설레기 마련이다.

불현 듯 기쁜 소식이 찾아오는 것처럼 반가우니, 어찌 봄비가 이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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