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출처: 고정희 시집 『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사, 1987.
*약력: 고정희(高靜熙)는 1948년 전남 해남 출신, 한국신학대학 졸업, 1991년 6월 9일 지리산 뱀사골 계곡에서 폭우로 불어난 급류에 휩쓸려 세상을 떠났다.
봄비는 생명이고 기다림이며 희망이다.
봄비는 꼭 필요한 때 알맞게 내리는 비이기에 풍년을 예고하는 단비라고 한다.
봄비로 말미암아 가문 대지의 숨결과 이 땅에 살아가는 뭇 생명의 생기도 살아난다.
생명을 잉태하는 초목뿐 아니라 겨우내 움츠렸던 사람들도 봄비에 설레기 마련이다.
불현 듯 기쁜 소식이 찾아오는 것처럼 반가우니, 어찌 봄비가 이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빛나는세상 > 출석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희망 사육 / 박진형 (0) | 2023.03.21 |
---|---|
봄 / 김기택 (0) | 2023.03.20 |
봄 풍경 / 신달자 (0) | 2023.03.17 |
어머니의 애인 / 주용일 (0) | 2023.03.17 |
묘비명 / 김광규 (0) | 2023.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