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커브 / 신현정

믈헐다 2021. 12. 5. 01:49

커브 / 신현정

 

자전거를 타고 하는 커브가 나는 좋아

전신주 앞에서 커브했다

막다른 골목인 줄 뻔히 알면서도 영광문구 지나 청과상회 지나

석유집 꺾어 들어 커브했다

미장원 앞에서 커브했다

마침 은숙이가 오기에 은숙이 앞에서 커브했다

우체국 앞에서 커브했다

바람같이 내달리다가 우체국 앞에서 커브했다

칸나 앞에서 커브했다

칸나가 팔 높이 쳐들고 있기에 나도 팔 쳐들고

한 손으로 커브했다.

 

*출처: 신현정 시집 『바보사막』,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약력: 1948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향년 61세로 별세.

 

(사진은 빛나는세상 나눔 공간 '수채화 님' 제공)

 

화자는 자전거를 타고 커브 도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묘사하였다.

수줍음이 많은 화자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돈다.

걷다가 좋아하는 사람을 마주치면 부끄러움에 어찌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은숙이는 골목 모퉁이에서 내내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은숙이 닮은 칸나 앞에서나 짐짓 팔을 쳐들고 알은체를 한다.

이 시를 통해 내게도 부끄러움에 커브를 도는 마음이 아직 남아 있는지 물어본다.

정면으로 내달리다가 수줍어서 살짝 휘어져 돌아나가는 마음 말이다.

휘파람을 불며 맑은 햇살 속에 자전거를 타고 커브를 도는 소년이 되고 싶다.

 

*출처: 빛나는 세상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