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인연 / 김해자
믈헐다
2021. 12. 29. 00:45
인연 / 김해자
너덜너덜한 걸레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또 망설인다
이번에 버려야지, 이번엔 버려야지, 하다
삶고 말리기를 반복하는 사이
또 한 살을 먹은 이 물건은 1980년생
연한 황금색과 주황빛이 만나 줄을 이루고
무늬 새기어 제법 그럴싸한 타올로 팔려온 이놈은
의정부에서 조카 둘 안아주고 닦아주며 잘 살다
인천 셋방으로 이사 온 이래
목욕한 딸아이 알몸을 뽀송뽀송 감싸주며
수천 번 젖고 다시 마르면서
서울까지 따라와 두 토막 걸레가 되었던
20년의 생애,
더렵혀진 채로는 버릴 수 없어
거덜난 생 위에 비누칠을 하고 또 삶는다
화염 속에서 어느덧 화엄에 든 물건
쓰다쓰다 놓아버릴 이 몸뚱이
*출처: 김해자 시집 『축제』, 애지, 2007.
*약력: 1961년 전라남도 신안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어떤 물건이든 오래된 것은 갸륵한 것이 많다.
이 시는 한낱 '걸레'에 대한 얘기가 인연으로 이어간다.
걸레가 20년 넘는 세월 동안 내 삶과 함께 하였다.
이 시의 맛깔스러움은 단연 인연을 중층적으로 얽어매고 있다는 점이다.
불교에서 말하길 모든 존재는 인연이 모아질 때 나타나고 흩어질 때 함께 소멸한다고 본다.
*참고
'타올'은 '타월(towel)'의 비표준어.
'화엄(華嚴)'은 온갖 수행으로 선행이나 덕행을 쌓는 의미.
*출처: 빛나는 세상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