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지우개 들고 / 권서각

믈헐다 2022. 2. 20. 01:50

지우개 들고 / 권서각

 

돌이켜보니 내 삶은

지우기의 연속이었네

학교에 다닐 때는

틀린 연필 자국 지우개로 지웠네

철들면서 어른이 되기까지는

하나둘 부끄러움을 지웠네

어른이 된 뒤로는 하나둘

헛된 바람을 지웠네

노인이 되어서도 지우개 들고

손으로는 무언가 자꾸만 지우면서

눈 들어 서편 하늘에, 누가 쓴

노을의 시 읽고 있네

 

*출처: 권서각 시집 『노을의 시』, 푸른사상, 2019.

*약력: 1951년 경북 순흥 출생, 본명은 권석창, 대구대학교대학원 문학 박사.

         ‘서각(鼠角)’은 환갑을 지나면서 쥐뿔도 아는 게 없다는 의미의 아호 겸 필명.

 

(MBC 무한도전 프로그램에서 발췌)

 

화자는 평생을 지우개로 지우기를 반복하며 살고 있다.

노인이 되어서도 서편 하늘에 시를 썼다 지우며 노을의 시를 읽는다.

우리는 돌아보면 지우고 싶은 순간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상처는 흉터가 남듯이 지운 자리에는 자국이 남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며 살고 있다.

지우고 싶은 걸 다 깨끗하게 지울 수는 없을 터이지만 언젠가는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겠는가.

 

*출처: 빛나는 세상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