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톱니 몇 줄 / 천수호
믈헐다
2022. 5. 27. 00:10
톱니 몇 줄 / 천수호
벌목장의 그 나무,
그 밑동에 톱날을 썰던 당신은
허벅지의 통증만을 느낀 게 아니었을 것이다
쩍쩍 갈라진 나이테가 롤빵처럼 풀어지지 않도록
톱질의 완급을 조절했을 것이다
이를 깨물고 악물어 박은
그 말씀만으로 마침내
노거수의 아름드리 밑동을
베어내곤 했을 것이다
이제는 늙어 수전증이 심한 아버지가
딸아, 덜덜덜 떨며 써 보낸 편지, 아
그
톱니 몇 줄
*출처: 천수호 시집 『우울은 허밍』, 문학동네, 2014.
*약력: 1964년 경북 경산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화자의 아버지는 수전증이 심하여 편지의 글자들은 톱니처럼 삐뚤었을 것이다.
롤빵을 썰 때처럼 나이테가 풀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나무를 톱질하듯 힘겹게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린 아버지이시다.
이를 깨물고 악물어 박은 그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노거수의 아름드리 밑동을 베어낼 만큼 크고 강하셨다.
아, 화자는 글을 쓸 때마다 한 그루 나무를 톱질하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리라.
*참고
‘허밍(humming)’은 입을 다물고 코로 소리를 내어 노래를 부르는 창법이다.
‘노거수(老巨樹)’는 수령(樹齡)이 많고 커다란 나무를 말함이다.
*출처: 빛나는 세상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