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자기라는 말에 종신보험을 들다 / 손택수
믈헐다
2022. 7. 2. 01:39
자기라는 말에 종신보험을 들다 / 손택수
자기라는 말,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딱딱하게 이어지던 대화 끝에
여자후배의 입술 사이로 무심코
튀어나온 자기, 어
여자후배는 잠시 당황하다
들고 온 보험서류를 내밀지 못하고 허둥거린다
한순간 잔뜩 긴장하고 듣던 나를
맥없이 무장해제 시켜버린 자기,
사랑에 빠진 여자는 아무 때고
꽃잎에 이슬이 매달리듯
혀끝에 자기라는 말이 촉촉이 매달려 있는가
주책이지 뭐야, 한번은 어머니하고 얘기할 때도 그랬어
꽃집 앞에 내다 논 화분을 보고도
자기, 참 예쁘다
중얼거리다가 혼자서 얼마나 무안했게
나는 망설이던 보험을 들기로 한다
그것도 아주 종신보험을 들기로 한다
자기, 사랑에 빠진 말 속에
*출처: 손택수 시집 『목련 전차』, 창비, 2006.
*약력: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경남대 국문과와 부산대 대학원 졸업.
오랜만에 만난 후배 여자의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자기’라는 말.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두 사람 사이가 어색하고 쑥스럽게 만들었다.
‘자기’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그 사람 자신을 말한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연인을 부르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나름대로 멋쩍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자기라는 말 한마디에 남자 선배는 종신보험을 들고 말았다.
아마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거나 사랑을 초월한 연민의 정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출처: 빛나는 세상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