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투명 / 이영광
믈헐다
2022. 9. 12. 06:25
투명 / 이영광
세상이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
위로다
집 팔고 세 얻어 휴일에 이사하는데,
동네에서 동네로 옮겨가는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희망 따위로 여기 살진 않았지만
나도 모를 열망에 휩싸여 중얼거리다 문득
집을 잃었지만,
집이 무기인 시절에
십년 면벽이 희망 익스프레스에 실려가는 걸
대낮의 아파트만 천개의 눈을 뜨고
멀뚱멀뚱 내려다본다
투명 이불 투명 책상 투명 바가지 투명 옷
야반도주하십니까
훔치는 중이십니까, 물어주길
바랐지만, 바라려고 애썼지만
내가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
위로다
투명인간은 땀을 뻘뻘 흘렸다!
괜찮다, 새집엔 빈 벽이 많다
사라진 짐들은 밤이면 나타나리라
나도, 나타나리라
장물아비처럼 낯선 거실에 앉아
투명 소주를 마신다
*출처: 이영광 시집 『나무는 간다』, 창비, 2013.
*약력: 1965년 경북 의성 출생, 고려대학교 영문과와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이다.
예전만 못하지만 명절은 시끌벅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파트 생활은 대부분 서로 모르고 지내는 사이니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그러나 화자는 그 모든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위안을 삼는다.
이렇듯 요즘의 세태는 모두가 투명 속에 사는 투명인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혼자서 거실에 앉아 투명 소주를 마시는 화자의 쓸쓸함이 엿보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