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가을 / 박경리

믈헐다 2022. 9. 29. 01:17

가을 / 박경리

 

방이 아무도 없는 사거리 같다

뭣이 이렇게 빠져나간 걸까

솜털같이 노니는 문살의 햇빛

 

조약돌 타고 흐르는 물소리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그러고 있다

세월 밖으로 내가 쫓겨난 걸까

 

창밖의 저만큼 보인다

칡넝쿨이 붕대같이 감아 올라간 나무 한 그루

같이 살자는 건지 숨통을 막자는 건지

 

사방에서 숭숭 바람이 스며든다

낙엽을 말아 올리는 스산한 거리

담뱃불 끄고 일어선 사내가 떠나간다

 

막바지의 몸부림인가

이별의 포한인가

생명은 생명을 먹어야 하는

 

원죄로 인한 결실이여

아아 가을은 풍요로우면서도

참혹한 계절이다 이별의 계절이다

 

*출처: 박경리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마로니에북스, 2008.

*약력: 1926년 경남 통영 출생, 1945년 진주고등여학교 졸업, 1950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 재직, 2008년 5월에 타계.

 

 

'토지'라는 대작을 남긴 박경리 선생의 유고 시집에 실린 시이다.

흔히들 가을이라 함은 수확의 계절, 풍요의 계절이라 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가을을 참혹하고 이별의 계절이라 한다.

마지막 결실이라고 침잠한다면 끝도 없는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을뿐더러

가을에 떠나야 하는 입장이라면 얼마나 또 가슴 아픈 계절이겠는가.

내년의 가을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깨우쳐 주는 시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