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중년(中年) / 고영민
믈헐다
2022. 10. 30. 00:51
중년(中年) / 고영민
거울을 보는데 내 얼굴에서
아버지가 보였다
중년이라고
중얼거려보았다
어제는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어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옛 친구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친구의 아버지, 어머니 들이 고스란히 불려나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내는 내가 아닌,
아버지를 부축했다
잠결엔 아버지가 내 아내의 몸을 더듬었다
죽은 아버지가 내 집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신다
*출처: 고영민 시집 『구구』, 문학동네, 2015.
*약력: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중년이 되면 거울을 보다가 얼핏 아버지가 또는 어머니가 그 자리에 있음을 발견할 때가 있을 것이고,
비로소 얼굴뿐만 아니라 걸음걸이나 말맵시까지 부모를 닮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자식들이 부모를 닮아가는 것은 하나도 이상스러운 일이 아니다.
유전인자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부모님의 영향 하에 있었는지를 따져본다면 말이다.
이 시가 잘 읽히는 이유는 그러한 공감대에 대해 타령하듯이 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중년이 되면 비단 얼굴이 부모님과 같아진다는 것에 있지 않다.
중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부모님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을 심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