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믈헐다
2022. 11. 6. 05:52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 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출처: 고영민 시집 『악어』, 실천문학사, 2012.
*약력: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시인은 신작 시집을 구기고 구겨 밑씻개로
“온전히 한 장 휴지”가 될 때야말로 부드럽게 읽힌다고 말한다.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야 한다는 건
똥구멍이 느끼는 감성적 반응으로 시를 빚어낸다는 것이다.
냄새나고 지저분한 똥구멍으로까지 읽어내는 시란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몸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시는 본질적으로 쓰는 일도 중요하지만 읽는 이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