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빈 섬 / 최연숙
믈헐다
2022. 12. 5. 00:48
빈 섬 / 최연숙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날
남편 전화번호가 입안에서 좌충우돌이다
몇십 개의 전화번호가 기억의 저장 통에서
바로 불려 나오던 시절, 오, 아날로그여
이름 모를 벌레가 사그락사그락 뇌를 갉아먹고
손안에 엉겨 붙은 스마트한 쇳덩이가
매 순간 정답이라며 던져준다
미처 인식도 하기 전 우린 한 몸이 되었다
행여 너를 잃어버린 날에는 일상이 증발해버린다
명사와 숫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방금 인사를 하고 돌아선 사람의 얼굴도 지워진다
왕이 된 너는 내 안에 들어앉아 명령어를 입력하고
맞춤 정보를 끊임없이 보여주며
삶에 할당된 시간까지 삼키고 있다
의식의 영토는 너에게 유린당하고
생각조차 쇠사슬에 묶여 끌려다니고 있다
우리는 저마다 빈 섬이 되어 갔다
대중교통은 물론, 길거리에서도 많은 사람이 스마트폰을 보고 있습니다.
*출처: 최연숙 시집 『모든 그림자에는 상처가 살고 있다』, 생명과문학, 2022.
*약력: 1960년 전남 영암 출생, 2005년 『시평』으로 작품 활동 시작.
지금은 스마트폰이 없으면 남편이나 아내의 전화번호는 물론이고
아이들 전화번호조차 입에서 바로 나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전화번호 몇십 개 정도는 너끈히 외웠을 터인데 말이다.
자신도 모르게 스마트폰은 뇌의 균형을 깨뜨리고 의식 자체가 스마트폰에 잠식되니
문명의 이기가 낳은 기계의 노예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인은 이 모든 것을 속 빈 강정처럼 '빈 섬'이 되어 가는 것이라고 비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