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시는 시를 짓밟지 않는다 / 김승일

믈헐다 2022. 12. 19. 21:41

시는 시를 짓밟지 않는다 / 김승일

 

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시는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신은 죽었다는 말처럼 들려왔다

 

​시가 바라던 꿈은 무엇일까

힘센 것들을 우르르 따라갈 때

시는 힘센 것들을 따르지 않는다

연약한 것들을 더 연약하게 할 때

시는 죽어가는 것들을 버리지 않는다

 

​더러운 상을 바라지 않는다

무수한 권력의 허망한 이름들을 향하여 박수칠 때

시가 맨 처음 바라던 꿈은 무엇일까

 

​지금, 여기서 사라져 가는 시의 영향력

여기서 끈질기게 살아남는 시라는 이름의 영향력

 

영향력 있는 것들을 좇지 않는다

 

​시 아닌 것들이 영향력에 굴복할 때

시는 스스로 한번도 보지 못한 영향력을 만들어 낸다

목소리 같은 반지를 약지에 끼우고

홀로인 시는 걸어간다

 

시 아닌 것들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러하여 시는 아직 오지 않은 시를 위하여

그러나 오고 있는 시를 향하여 노래한다

 

과거의 시는 현재의 시를 짓밟지 않는다

현재의 시는 과거의 시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시는 뭉쳐 미래를 모의하지 않는다

 

​홀로 온 시가 혼자 가듯이

시를 쓰고 있는 사람에게서 아무도, 아무것도

시가 맨 처음 꾸었던 꿈을 빼앗아 갈 수는 없다

 

*출처: 김승일 시집 나는 미로와 미로의 키스, 시인의 일요일, 2022.

*약력:서울 출생, 장안대학 문예창작학과와 수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과정 수료.

 

"시는 시를 짓밟지 않는다"

이 시제에서 말하는 폭력은 꼭 사전적 의미의 폭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장난처럼 내뱉은 말도 상대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는 것도 폭력일 수가 있다.

그러한 폭력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시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는 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견딜 수 있다.

설령 그 끈이 얇거나 짧다고 하더라도 분명 힘이 될 것이다.

결국 희망이란 격려와 응원뿐만 아니라

무심코 읽는 시 한 줄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