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맹물 / 이정록
믈헐다
2023. 3. 6. 23:50
맹물 / 이정록
맹물같이 말간 시를 쓰는 분들이 좋다. 강원도 이상국 시인과 제주의 김수열 시인과 밀양의 고증식 시인이 좋다. 남원의 복효근과 안동의 안상학과 강화도 함민복의 시는 냉수 사발 같다. 그런데 그 맹물이란 놈이 얼마나 힘이 세냐 하면 쳐들어오는 숟가락 젓가락을 확 꺾어버린다. 얼마나 웅숭깊은지 누구는 거기에서 살얼음 잡힌 기도문을 읽고 어떤 이는 별이며 보름달을 건진다. 그러나 가장 멋질 때는 마른 개밥그릇이나 닭장 모이통에 두어 모금 덜어줄 때다. 때 전 창호지 떼어내려고 다물었던 물을 내뿜을 때다. 먼지 이는 흙 마당에 나비물로 앉을 때다. 그나저나 포플러 이파리처럼 찬란한 맹물 시인들 중간쯤에 찌그러진 양재기를 머리에 쓰고 이정록이란 시답잖은 놈이 산다.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마른입 쩌억 벌리고.
*출처: 이정록 시집 『그럴 때가 있다』, 창비, 2022.
*약력: 1964년 충남 홍성 출생, 공주대학교 한문교육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수료.
'맹물'은 아무것도 타지 아니한 물이나
하는 짓이 야무지지 못하고 싱거운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 시의 맹물은 전자의 의미이다.
아무것도 타지 않는다는 것은 남의 색깔에다 덧칠하는 것이 아닌
오롯이 자신만의 색깔을 나타냄을 말하는 것이리라.
시인은 맹물 같은 시를 기웃거리는 자신을 나무라지만
그렇기에 또 이런 맹물 같은 시가 탄생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