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내 나이 열여섯, "야!"
돌아보는 대신 걸음을 살짝 늦췄다.
"이 새끼가 졸라 사랑한단다!" 묵직한 웃음이 와르르 쏟아졌다.
달려가면서 또 소리친다. "졸라 보고 싶었대!"
그들을 향해 신발주머니를 홱 던졌다.
흙바닥에 너부러진 슬리퍼 두 짝을 집요하게 노려봤다.
신발주머니에 담을 것을 생각하니, 신경질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졸라 사랑한다는 애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그나마 좀 덜 억울했을 거다.
내 나이 열아홉, 교실 뒷문에서 누군가가 J를 불렀다.
창가에 앉아 있던 J가 고개를 돌려 환하게 웃었다.
아름다웠다. 가슴이 뛰었다.
머릿속 굵은 핏줄 하나가 터져 버린 듯 심각한 두통이 밀려왔다.
손발이 저렸다. 나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굴렀다. 몸이 둥실 떠올랐다.
J가 웃을 때마다 콩콩, 머리로 교실 천장을 박았다.
J와 키스하는 모습을 그려봤다.
머릿속이 잠시 암전되었다가, 귀퉁이부터 노랗게 물들어 갔다.
심장이 뛰고 손발이 저렸다. 라일락 향기가 날 것이다.
꽃잎을 씹듯 촉촉하고 부드럽겠지만, 늦가을 서리처럼 차고 아플 것도 같다.
종소리가 날까? 정말 그럴까?
*출처: 『가슴 뛰는 소설』, 최진영, 박상영 외, 창비교육, 2020. p.13~14. p.30. 발췌.
(사진은 빛나는세상 나눔의 공간 '수채화님' 제공)
*참고
'졸라'는 책의 원문은 욕설이라 '많이'라는 뜻으로 '믈헐당'이 조어(새로 말을 만듦)함.
'J'는 여고 3년 같은 반인 동성.
'암전(暗轉)'은 무대를 어둡게 한 상태에서 무대 장치나 장면을 바꾸는 일.
*출처: 빛나는 세상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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