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어떠세요
스무 살,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걸 그룹 데뷔 조 발탁되어 입학하자마자 미련 없이 자퇴하고 데뷔 준비.
데뷔 목전에 그룹 핵심 멤버가 갑자기 자국으로 귀국하는 바람에 팀 해체.
실패는 인간을 성숙하게 한다. 개소리다. 실패는 인간을 한껏 구겨지고 쪼그라들게 만든다.
실패에 그럴듯한 의미를 붙이는 사람들치고 제대로 된 성공을 해 본 사람이 없다고 나는 믿는다.
스물한 살, 두 번이나 아이돌 데뷔 조에 발탁되었다가 끝내 탈락하는 바람에 재입학, 또 한 번의 신입생.
‘곰곰’을 처음 만난 것은 ‘연극과 문화’ 수업 시간. 연극영화과에서 소외 된 나와 영문과 신입생 몇몇은 「햄릿」을 공연.
곰곰은 햄릿, 내가 오필리어 역. 우리의 「햄릿」은 철저하게 실패.
학교 앞 호프집에서 공연 뒤풀이. 얼큰하게 취해 화장실 문에 기댄 나에게 곰곰이 반쯤 감은 눈으로 말했다.
“좋아해.” 우리는 키스를 했다. 왜 그랬지?
반지하인 곰곰의 집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냄새하며 오래된 냉장고, 피사의 사탑처럼 기우뚱한 왕자 행어,
무릎이 늘어난 유니클로 청바지. 바퀴벌레, 그리마, 바구미, 지네가 함께 살 것 같은 곳.
우리는 김과 콩자반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착각하지 마, 나 여기서 너랑 사는 거 아니야, 우리는 그런 진지한 사이가 아니라고,
언제든 내키면 이 거지 같은 집구석 나갈 거라고, 알겠냐.”
화장실 문을 열자 곰곰의 목에 샤워 타월이 감겨 있었다. 눈이 벌겋게 충혈 되어 있고,
얼굴은 침과 눈물범벅. 논에 내팽개쳐진 허수아비 같은 꼴이 웃겨서 나도 모르게,
“시골 애들도 자살을 하니?” 말하고 웃어버렸다.
이후에도 락스와 샴푸를 섞어 마시는 애교 섞인 자살시도,
좀 더 진지해져 볼 생각이 들었는지 과도로 손목을 여섯 번쯤 긋기도 했다.
이별을 결심하고 뭔가 결단을 내리려 할 때마다 곰곰은 “네가 있어 다행이야”라며 내 손을 잡았다.
스물넷 살, 오디션이 열리는 일산의 한 대형 세트장으로 향했다. 서바이벌 오디션이 방영되기 시작했다.
녹화 첫날에 회수해 갔던 핸드폰을 열흘 만에 돌려받았다. 곰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있잖아, 나 다음 달에 군 입대해.”
더 이상 연락할 사람도, 필요도 없었다. 곧장 핸드폰을 정지시켰다. 우리를 이어 주던 마지막 끈이 끊어졌다.
나는 오 주 만에 떨어졌다.
누군가는 아직 아무 시작도 하지 않았을 나이에 포기와 체념이 때로는 나를 위한 최선일 수 있음을 배웠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 드는 조명을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씨발, 청승맞게 왜 이럴 때 눈물이 나고 난리일까.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도 목소리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데, 이상하게 몇 줄의 대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밤하늘의 별을 의심하지 마시오.
태양의 움직임을 의심하지도 마시오.
비록 진리를 허위라 의심해도,
나의 사랑을 의심하지는 마시오.
사랑하는 오필리어여, 나는 비록 시에는 서투를지 모르나,
오직 한없이 그대를 사랑하오.
이 마음 부디 믿어 주기를.
안녕히. 이 생명 죽을 때까지 목숨바쳐 사랑하는 그대여.
이 몸도 마음도 그대의 것이오.
손가락 사이로 빛이 새어 들었다. 언젠가 이 손을 뜨겁게 잡아주던 사람이 있었다. 곰곰. 나의 햄릿.
*출처: 『가슴 뛰는 소설』, 최진영, 박상영 외, 창비교육, 2020. pp.39~65. 발췌.
(사진은 빛나는세상 나눔의 공간 '수채화님' 제공)
*참고
전문 27페이지 분량에서 발췌하다 보니, 다소 긴 글을 출석부에 올린 점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출처: 빛나는 세상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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