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뒷면 / 정현우
참외를 먹다 벌레 먹은
안쪽을 물었습니다.
이런 슬픔은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뒤돌아선 그 사람을 불러 세워
함께 뱉어내자고 말했는데
아직 남겨진 참외를 바라보다가
참회라는 말을 꿀꺽 삼키다가
내게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먼 사람의 뒷모습은
눈을 자꾸만 감게 하는지
나를 완벽히 도려내는지
사랑에도 뒷면이 있다면
뒷문을 열고 들어가 묻고 싶었습니다.
단맛이 났던 여름이 끝나고
익을수록 속이 빈 그것이
입가에서 끈적일 때
사랑이라 믿어도 되냐고
나는 참외 한입을
꽉 베어 물었습니다.
*출처: 정현우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2021.
*약력: 1986년 평택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현 KBS1라디오 작가, 음반은 라임 2집 ‘바람에 너를’
이런 슬픔은 이별의 경험이다.
그것이 배우고 싶지 않다고 마음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단맛을 즐기다 벌레가 있다고 뱉어 내는 것처럼 흠을 핑계로 떠나는 건 사랑이 아니다.
내가 잘못했으니 제발 떠나지 말아 달라고 용서를 구하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는다.
참회가 필요한 건 떠난 사람이지만 남은 사람이 눈을 감고 반성한다.
참회란 마음의 죄를 숨김없이 드러내어 용서를 구하는 겸허한 태도다.
또다시 사랑이라 믿어도 되냐며 참외 한입을 꽉 베어 무는 화자의 심정이 어떨까.
*출처: 빛나는 세상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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