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사랑의 뒷면 / 정현우

믈헐다 2021. 11. 19. 06:06

사랑의 뒷면 / 정현우

 

참외를 먹다 벌레 먹은

안쪽을 물었습니다.

이런 슬픔은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뒤돌아선 그 사람을 불러 세워

함께 뱉어내자고 말했는데

아직 남겨진 참외를 바라보다가

참회라는 말을 꿀꺽 삼키다가

내게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먼 사람의 뒷모습은

눈을 자꾸만 감게 하는지

나를 완벽히 도려내는지

사랑에도 뒷면이 있다면

뒷문을 열고 들어가 묻고 싶었습니다.

단맛이 났던 여름이 끝나고

익을수록 속이 빈 그것이

입가에서 끈적일 때

사랑이라 믿어도 되냐고

나는 참외 한입을

꽉 베어 물었습니다.

 

*출처: 정현우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2021.

*약력: 1986년 평택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현 KBS1라디오 작가, 음반은 라임 2집 ‘바람에 너를’

 

이런 슬픔은 이별의 경험이다.

그것이 배우고 싶지 않다고 마음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단맛을 즐기다 벌레가 있다고 뱉어 내는 것처럼 흠을 핑계로 떠나는 건 사랑이 아니다.

내가 잘못했으니 제발 떠나지 말아 달라고 용서를 구하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는다.

참회가 필요한 건 떠난 사람이지만 남은 사람이 눈을 감고 반성한다.

참회란 마음의 죄를 숨김없이 드러내어 용서를 구하는 겸허한 태도다.

또다시 사랑이라 믿어도 되냐며 참외 한입을 꽉 베어 무는 화자의 심정이 어떨까.

 

*출처: 빛나는 세상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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