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아프면 안 된다던 말 / 이영광

믈헐다 2022. 1. 14. 01:50

아프면 안 된다던 말 / 이영광

 

아프면 안 된다

아프지 말아야 한다

 

아프면 앓고,

앓다가 숨 멎으면 내다 묻는

그런 곳 그러한 세월에

아프면 안 되었다

아프지 말아야 한다고

아픈 듯 슬픈 듯 다짐받던

식구들 번갈아 앓아눕고

픽픽 쓰러지는 동안

나는 한 번도 앓아눕지 않았다

 

마흔도 한참 넘어 처음 몸살에 시달릴 때

귀신한테 깔려 매 맞는 것 같던 때

 

아픈 사람이, 아프면 안 된다니

당신 날 웃기려는 거지?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헛소리한 게 맞았을 것이다

정신없이

나는 아프지 않았다

 

식구들 생각난다

아프면 안 된다니,

그런 코미디를 하면서도

웃지도 않고 살다 간

 

*출처: 이영광 시집 『나무는 간다』, 창비, 2013.

*약력: 1965년 경북 의성 출생, 고려대학교 영문과와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그림 출처: 간호·간병통합서비스센터)

 

아픈 것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아픈 식구를 지켜보는 심정은 또 얼마나 괴로운가.

그 틈에서 아프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여북 가슴이 미어지겠는가.

식구들 번갈아 앓아눕고 픽픽 쓰러지는 동안

한 번도 앓아눕지 않았다는 시인의 말이 아픈 사람보다 더 아파 보인다.

'아프면 안 된다'는 말은 아파 본 사람만이 헤아릴 수 있으리라.

 

*출처: 빛나는 세상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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