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밥그릇 식구 / 길상호

믈헐다 2022. 6. 17. 00:10

밥그릇 식구 / 길상호

 

처마 밑에 놓인 밥그릇

아침엔 까치가 기웃대더니

콩새도 콩콩 깨금발로 다가와

재빨리 한입,

빗방울이 먹다 간 한쪽은

팅팅 불어 못 먹을 것 같은데

햇살이 더운 혓바닥으로 쓰윽,

저마다 배를 불린다

정작 그릇 주인인 고양이는

잠을 자다 뒤늦게 나와

구석에 남은 몇 알로

공복을 누리지 못해 야아옹,

뒷마당으로 사라지고

고양이가 흘리고 간 한 알

개미들이 기다랗게 줄을 선다

텃밭에서 돌아온 할아버지

텅 빈 밥그릇을 보고 허허,

또 한 그릇 덜어낸 사료 포대처럼

조금 더 허리가 휜다

 

*출처: 길상호 시집 『눈의 심장을 받았네』, 실천문학사, 2010.

*약력: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나눔의 현장: 탑골공원 무료 급식 장면)

 

인간은 자기 밥그릇 싸움을 하며 배를 불리지만 고양이 밥그릇은 어떤가.

까치, 콩새, 빗방울, 햇살, 개미 따위가 와서 조금씩 나눠 먹고 배를 불리고 간다.

시인은 이 밥그릇에 모인 작은 공동체를 식구라고 불러준다.

정작 밥그릇 주인인 고양이는 배불리 먹지도 못하지만,

내 밥그릇을 비우면 뭇 생명들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화두를 던진다.

 

*출처: 빛나는 세상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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