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 식구 / 길상호
처마 밑에 놓인 밥그릇
아침엔 까치가 기웃대더니
콩새도 콩콩 깨금발로 다가와
재빨리 한입,
빗방울이 먹다 간 한쪽은
팅팅 불어 못 먹을 것 같은데
햇살이 더운 혓바닥으로 쓰윽,
저마다 배를 불린다
정작 그릇 주인인 고양이는
잠을 자다 뒤늦게 나와
구석에 남은 몇 알로
공복을 누리지 못해 야아옹,
뒷마당으로 사라지고
고양이가 흘리고 간 한 알
개미들이 기다랗게 줄을 선다
텃밭에서 돌아온 할아버지
텅 빈 밥그릇을 보고 허허,
또 한 그릇 덜어낸 사료 포대처럼
조금 더 허리가 휜다
*출처: 길상호 시집 『눈의 심장을 받았네』, 실천문학사, 2010.
*약력: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인간은 자기 밥그릇 싸움을 하며 배를 불리지만 고양이 밥그릇은 어떤가.
까치, 콩새, 빗방울, 햇살, 개미 따위가 와서 조금씩 나눠 먹고 배를 불리고 간다.
시인은 이 밥그릇에 모인 작은 공동체를 식구라고 불러준다.
정작 밥그릇 주인인 고양이는 배불리 먹지도 못하지만,
내 밥그릇을 비우면 뭇 생명들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화두를 던진다.
*출처: 빛나는 세상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