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아내의 등 / 고영민

믈헐다 2022. 7. 7. 04:16

아내의 등 / 고영민

 

​아내의 등을 민다

그녀의 뒷모습, 한 페이지를

때수건으로 민다

기울게 쌓아올린 척추 마디

피사의 사탑을 생각하며

나는 아내의 등을 민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팔이 닿지 않는 그 가려운 탑신

아내의 등 사각지대엔

빨간 앵초꽃이 피어난다

세월의 한켠

묵념처럼 뒤돌아 앉은 삶

언제쯤 나는 말을 걸어야 하나

언제쯤 나는 말을 놓아야 하나

빈 명찰 같은 사람아

첫선을 보듯 앉아 있는 내 중년의 얼굴이

그녀의 등

볼록거울에 비친다

 

*출처: 고영민 시집 『악어』, 실천문학사, 2005.

*약력: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앵초꽃)

 

화자는 아내의 등을 밀다 앙상히 들어나는 척추를 통해 그녀가 살아온 흔적을 느낀다.

아내의 척추는 이탈리아 대성당에 있는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을 미니 빨간 앵초꽃이 피어난다는 시어가 가슴이 쓰리다.

오직 가족들을 위해 빈 명찰 같은 삶을 살아온 아내이기에 화자는 더 아릴 것이리라.

 

*참고

‘한켠’은 '어느 하나의 편이나 방향'을 뜻하는 ‘한편(한便)’이 바른 표기이다.

 

*출처: 빛나는 세상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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