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 / 박지웅
여자의 혀는 정직하고 차가웠다
입에서 나오는 가장 낮은 온도 잘 가
마트에서 구입한 제품처럼 건넨 잘 가
나는 잘 가를 받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앞뒤 잘린 토막의 말
잘 가는 피가 빠지는 데 몇 달이 걸렸다
몇 달째 꿈쩍하지 않는 잘 가
가끔 이름을 불러보았으나
잘 가는 선뜻 나오지 않았다
고깃덩어리로 썩어가는 잘 가를
꺼내어 몇 번 삼키려 했으나
오래된 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냉장고는 온통 사후의 세계
나는 냉장고에 심장을 넣고 기다린다
내 혀는 아직 핏물이 덜 빠졌다
*출처: 박지웅 시집 『나비가면』, 문학동네, 2021.
*약력: 1969년 부산 출생,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잘 가라는 말은 헤어지면서 아무 탈 없이 편하고 순조롭게 가라는 인사말이다.
헤어지면서 나누는 인사라 할지라도 다시 만난다는 전제 조건이 따른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사귐이나 맺은 정을 끊고 갈라서면서 하는 인사말이다.
화자는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가 않아 냉장고에다 넣어두고 무작정 기다린다.
얼마나 심장이 쓰렸으면 고깃덩어리로 썩어가는 ‘잘 가’를 삼키려 했을까.
*출처: 빛나는 세상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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