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잘 가 / 박지웅

믈헐다 2022. 7. 28. 01:39

잘 가 / 박지웅

 

여자의 혀는 정직하고 차가웠다

입에서 나오는 가장 낮은 온도 잘 가

마트에서 구입한 제품처럼 건넨 잘 가

나는 잘 가를 받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앞뒤 잘린 토막의 말

잘 가는 피가 빠지는 데 몇 달이 걸렸다

몇 달째 꿈쩍하지 않는 잘 가

가끔 이름을 불러보았으나

잘 가는 선뜻 나오지 않았다

고깃덩어리로 썩어가는 잘 가를

꺼내어 몇 번 삼키려 했으나

오래된 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냉장고는 온통 사후의 세계

나는 냉장고에 심장을 넣고 기다린다

내 혀는 아직 핏물이 덜 빠졌다

 

*출처: 박지웅 시집 『나비가면』, 문학동네, 2021.

*약력: 1969년 부산 출생,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잘 가라는 말은 헤어지면서 아무 탈 없이 편하고 순조롭게 가라는 인사말이다.

헤어지면서 나누는 인사라 할지라도 다시 만난다는 전제 조건이 따른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사귐이나 맺은 정을 끊고 갈라서면서 하는 인사말이다.

화자는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가 않아 냉장고에다 넣어두고 무작정 기다린다.

얼마나 심장이 쓰렸으면 고깃덩어리로 썩어가는 ‘잘 가’를 삼키려 했을까.

 

*출처: 빛나는 세상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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