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 허형만
숲속에서 야생 초록빛 오디가
자주빛으로 익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행복하다.
그냥 그 모습만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줏빛 속에서 햇볕과 빗소리도
함께 익어가는 것을 보아야 행복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먹빛으로 완성을 이룰 때
혀에서 꿈결처럼 무르녹는
달콤한 맛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유년 시절 맛보았던 그 맛 그대로
지금 늙어서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면
늙는 것도 익는 것이라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출처: 허형만, 『만났다』, 황금알, 2022.
*약력: 1945년 전라남도 순천 출생,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성신여대 국문학 박사.
맛이란 음식 따위를 혀에 댈 때에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하여 느끼는 기분까지도 아울러 말한다.
즉 맛이란 음식과 함께 기분까지 좋아야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 있다.
"유년 시절 맛보았던 그 맛 그대로 / 지금 늙어서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면 / 늙는 것도 익는 것이라 그것이 행복이다."
황혼에 물들어 갈 때 어린 시절 함께했던 추억의 맛을 생생하게 기억한다면 그것도 바로 행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