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행복 / 허형만

믈헐다 2023. 1. 26. 23:24

행복 / 허형만

 

숲속에서 야생 초록빛 오디가

자주빛으로 익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행복하다.

그냥 그 모습만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줏빛 속에서 햇볕과 빗소리도

함께 익어가는 것을 보아야 행복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먹빛으로 완성을 이룰 때

혀에서 꿈결처럼 무르녹는

달콤한 맛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유년 시절 맛보았던 그 맛 그대로

지금 늙어서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면

늙는 것도 익는 것이라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출처: 허형만, 만났다, 황금알, 2022.

*약력: 1945년 전라남도 순천 출생,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성신여대 국문학 박사.

 

 

맛이란 음식 따위를 혀에 댈 때에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하여 느끼는 기분까지도 아울러 말한다.

즉 맛이란 음식과 함께 기분까지 좋아야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 있다.

"유년 시절 맛보았던 그 맛 그대로 / 지금 늙어서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면 / 늙는 것도 익는 것이라 그것이 행복이다."

황혼에 물들어 갈 때 어린 시절 함께했던 추억의 맛을 생생하게 기억한다면 그것도 바로 행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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