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푸른 스커트의 지퍼 / 오세영

믈헐다 2023. 2. 14. 02:46

푸른 스커트의 지퍼 / 오세영

 

농부는

대지의 성감대가 어디 있는지를

잘 안다.

욕망에 들뜬 열을 가누지 못해

가쁜 숨을 몰아쉬기조차 힘든 어느 봄날,

농부는 과감하게 대지를 쓰러뜨리고

쟁기로

그녀의 푸른 스커트의 지퍼를 연다.

아, 눈부시게 드러나는

분홍빛 속살,

삽과 괭이의 그 음탕한 애무, 그리고

벌린 땅속으로 흘리는 몇 알의 씨앗.

대지는 잠시 전율한다.

맨몸으로 누워 있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땀을 닦는 농부의 그 황홀한 노동,

그는 이미

대지가 언제 출산의 기쁨을 가질까를 안다.

그의 튼실한 남근이 또

언제 일어설지를 안다.

 

*출처: 오세영 시집 푸른 스커트의 지퍼, 연인M&B, 2010.

*약력: 1942년 전남 영광군,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농부와 대지와의 성적 교감을 그리고 있으니 여느 시와는 좀 색다르고

"푸른 스커트의 지퍼"라는 시제 한 토막이 시 한 편이나 다름없이 느겨지는 건 또 뭘까.

대지가 내 자신이자 어머니이고 나의 현주소이자 나의 고향이라면 시인에게는 자연이 그렇지 않겠는가.

농부의 남근과 대지의 성감대가 생명으로 한껏 차서 생동감이 흘러넘치니

농부이건 시인이건 자연이나 우주에 순응한다면 튼실한 열매를 맺을 것이리라.

'빛나는세상 > 출석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작 對酌 / 이동재  (0) 2023.02.16
예쁜 꽃 / 홍사성  (0) 2023.02.15
빨랫비누가 닳아지듯이 / 이미산  (0) 2023.02.13
행복 / 정채봉  (0) 2023.02.12
첫사랑 / 고영민  (0) 2023.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