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스커트의 지퍼 / 오세영
농부는
대지의 성감대가 어디 있는지를
잘 안다.
욕망에 들뜬 열을 가누지 못해
가쁜 숨을 몰아쉬기조차 힘든 어느 봄날,
농부는 과감하게 대지를 쓰러뜨리고
쟁기로
그녀의 푸른 스커트의 지퍼를 연다.
아, 눈부시게 드러나는
분홍빛 속살,
삽과 괭이의 그 음탕한 애무, 그리고
벌린 땅속으로 흘리는 몇 알의 씨앗.
대지는 잠시 전율한다.
맨몸으로 누워 있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땀을 닦는 농부의 그 황홀한 노동,
그는 이미
대지가 언제 출산의 기쁨을 가질까를 안다.
그의 튼실한 남근이 또
언제 일어설지를 안다.
*출처: 오세영 시집 『푸른 스커트의 지퍼』, 연인M&B, 2010.
*약력: 1942년 전남 영광군,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농부와 대지와의 성적 교감을 그리고 있으니 여느 시와는 좀 색다르고
"푸른 스커트의 지퍼"라는 시제 한 토막이 시 한 편이나 다름없이 느겨지는 건 또 뭘까.
대지가 내 자신이자 어머니이고 나의 현주소이자 나의 고향이라면 시인에게는 자연이 그렇지 않겠는가.
농부의 남근과 대지의 성감대가 생명으로 한껏 차서 생동감이 흘러넘치니
농부이건 시인이건 자연이나 우주에 순응한다면 튼실한 열매를 맺을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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