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통도사 빗소리 / 손택수

믈헐다 2023. 2. 18. 23:56

통도사 빗소리 / 손택수

 

탁구공 튀는 소리다

스님들도 목탁대신

탁구를 칠 때가 다 있네

절집 처마 아래 앉아 비를 긋는 동안

함께 온 귀머거리 여자는

영문을 모른 채 그저 숫저운

미소만, 미소만 보이는데

通度라면 인도까지 갈까

저 빗소리, 내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그 머나먼 서역까지 이를까

흙이 아프지 말라고,

흙의 연한 살이 다치지 말라고

여자는 처마 아래 조약돌을 가지런히

깔아주고 있는데, 그

위에서 마구

튀어 오르는 빗방울,

저 빗방울

하늘과 땅이 주고받아 치는 탁구공 소리다

 

*출처: 손택수 시집 호랑이 발자국, 창비, 2003.

*약력: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경남대 국문과와 부산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절집 처마 아래 두 남녀가 비를 피하고 있다.

남자는 "스님들도 목탁대신 / 탁구를 칠 때가 다 있네" 라며 처마 밑의 어색함을 짐짓 덜어보려고 한다.

"함께 온 귀머거리 여자는 / 영문을 모른 채 / 그저 숫저운 미소만, 미소만 보이는데"

행여 "흙의 연한 살이 다치지 말라고 / 여자는 처마 아래 조약돌을 가지런히 / 깔아주고 있는데,

그 / 위에서 마구 / 튀어 오르는 빗방울," "하늘과 땅이 주고받아 치는 탁구공 소리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표현인가.

땅을 박차고 튀어 오르는 빗방울이 내 가슴까지 튀어 오르게 한다.

마치 시인과 내가 탁구공을 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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