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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 권진희

너 / 권진희 ​돌아누운 산등성이 휜 허리도 동그랗게 마주 누운 묵뫼도 모두 너구나. 마주 누워 널 껴안아도 네 가슴에 입 맞출 수 없는 나는 산 너머에만 있어서 네 쪽으로 지는 저녁 사흘 겨울비에 젖는 마른 나뭇가지 모두 너구나. 온통 너구나. *출처: 권진희 시집 『죽은 물푸레나무에 대한 기억』, 푸른사상사, 2012. *약력: 1967년 대구 출생(男),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석사, 문예창작학과 박사 과정. “산 너머에만 있어서 / 네 쪽으로 지는 저녁”이라니, 화자는 온통 당신 생각뿐이다. 산등성이도 묵뫼도 마른 나뭇가지까지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당신과 연결시키니 말이다. 그런 마음이 첫사랑부터 끝 사랑까지 변함없으면 좋겠지만, 어디 사랑이 그런가. 겨울비에 자꾸 젖다 보면 식어버리니 말이..

저문 외길에서 / 박남준

저문 외길에서 / 박남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져가는 것 그는 모르는지 길 끝까지 간다 가는데 갔는데 ​기다려본 사람만이 그 그리움을 안다 무너져내려본 사람만이 이 절망을 안다 저문 외길에서 사내가 운다 소주도 없이 잊혀진 사내가 운다 *출처: 박남준 시집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창비, 1995. *약력: 1957년 전남 영광 출생, 1984년 시 전문지 [시인]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우리 모두는 한 번쯤 사랑에 실패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들 대부분은 흘러간 시간 속에서 추억이 된다지만, 때론 잊고 싶어도 절대로 잊히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움이 아닐까. “소주도 없이 잊혀진 사내가 운다”는 건 그리움을 안다는 것이리라. “저문 외길”에서 말이다.

마중 / 허림

마중 / 허림 사랑이 너무 멀어 올 수 없다면 내가 갈게 말 한마디 그리운 저녁 얼굴 마주하고 앉아 그대 꿈 가만가만 들어주고 내 사랑 들려주며 그립다는 것은 오래전 잃어버린 향기가 아닐까 사는 게 무언지 하무뭇하니 그리워지는 날에는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 *출처: 허림 산문집 『보내지 않았는데 벌써 갔네』, 달아실, 2021. *약력: ​1960년 강원도 홍천 출생, 강릉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이 시는 윤학준 작곡으로 2014년 화천 비목콩쿠르에서 창작 가곡 1위를 차지하였다. 이어 소프라노 조수미의 한국가곡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발표한 앨범의 타이틀곡이기도 하다. “사랑이 너무 멀어 올 수 없다면 내가 갈게”라는 첫 문장이 참 좋다. 쉬운 말 같지만 그 속에 담긴 절절한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