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좋으면 / 김해자
가끔 찾아와 물들이는 말이 있다
두레박 만난 우물처럼 빙그레 퍼져나가는 말
전생만큼이나 아득한 옛날 푸른 이파리 위에
붉은 돌 찧어 뿌리고 토끼풀꽃 몇 송이 얹어
머시마가 공손히 차려준 손바닥만 한 돌 밥상 앞에서
이뻐, 맛있어, 좋아,
안 먹고도 냠냠 먹던 소꿉장난처럼
덜 자란 풀꽃 붉게 물들이던 말
덩달아 사금파리도 반짝 빛나게 하던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말한 게 다인 말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말
나만 얻어먹고 되돌려주지 못한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붉은 돌에 오소록 새겨진
*출처: 김해자 시집 『집에 가자』, 삶창, 2015.
*약력: 1961년 전남 신안군 출생하여 목포시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화자는 사내아이와 계집아이가 소꿉놀이하며 노는 풍경을 시에다 담았다.
사내아이는 돌 밥상 위에 흙으로 밥을 짓고 풀꽃으로 반찬을 장만하여 내놓았다.
그러고는 둘이는 맛있게 먹는 시늉을 한다.
사내아이는 경상도 말투로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라고 말한다.
아마도 무심하듯 무뚝뚝하게 말했을 터이지만, 그 말이 계집아이의 발등 아래로 툭 떨어졌을 것이다.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아, 이 말은 얼마나 때 묻지 않고 어마어마한 말인가.
*출처: 빛나는 세상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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