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아내와 나 사이 / 이생진

믈헐다 2021. 11. 13. 01:15

아내와 나 사이 / 이생진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출처: 월간 <우리詩> 2008년 10월호.

*약력: 1929년 충남 서산 출생, 서산 농림학교(6년) 졸업, 국제대학 영문학과 수학,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언어학과 중퇴, 중고등학교 교사 생활, 현재 세는나이 93세의 시인으로 지금도 왕성한 시작 활동, 매일 어김없이 15,000보 산책.

(사진 출처: '사랑의 징검다리', 부산일보, 2021.11.11.)

'생로병사生老病死'는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외길이다.

내 몸에서 기억이 하나둘 나를 빠져나가서 마침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나이.

창문과 냉장고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을 상상만 해도 앞이 막막하고 울컥한다.

시인은 차분하게 이 참담한 상황을 정리한다.

삶이란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일 뿐이라고.

그리고 자책하듯이 거창하게 인생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며, 

마치 삶의 본질이 거기에 있기나 한 것처럼 핏대를 올리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고 말이다.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우린 너무 먼 데서 살고 있다고 한다.

 

*출처: 빛나는 세상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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