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뼘 / 천수호
그때 당신은 키가 컸다
나를 감싸고도 두 뼘이 남았다
바람이 그 두 뼘에만 고였다가 흘러갔다
나는 바람 맞을 준비도 하지 않았다
두 뼘의 여유로 고개를 수그리지도 않았다
두 뼘은 빈 웅덩이처럼 채울 것이 많아서
당신이 사준 화장품도 올려놓고
당신이 부어주던 핏빛 와인도 얹어놓고
이쁘다, 잘한다는 기분 좋은 형용사들도 늘어놓고
당신이 심어준 넝쿨장미도 기대놓고
가끔 내밀어준 시의 말도 걸어놓고
앞 머리칼 날리며 불러준 사랑의 노래도 풀어놓았다
너무 기대어서 두 뼘만큼 틈이 벌어졌다
나와 당신의 두 뼘 키
바람은 그 속에서 만들어졌다
*출처: 천수호 시집 『수건은 젖고 댄스는 마른다』, 문학동네, 2020.
*약력: 1964년 경북 경산 출생, 명지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졸업.
천수호 시인은 얼핏 남성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여류 시인이다.
시 속에 나오는 남녀는 부부간이거나 연인 관계일 것이다.
두 뼘이란 신체적 키 차이를 말하거나 주고받는 사랑 차이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 차이만큼 숱한 바람이 그 사이로 지나갔다.
화자는 바람을 맞을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니 빈 웅덩이처럼 화자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너무 기대어서 두 뼘만큼 틈이 벌어졌다면
키 높이(눈높이)를 맞추거나 바람을 맞을 준비를 하여야 하지 않을까.
*출처: 빛나는 세상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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