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세탁 / 박영희
마지막 헹굼에 피죤을 넣다 말고
물끄러미 안을 훔쳐본다
그저께 벗어두고
어저께 벗어둔
속옷들, 너울너울 춤을 춘다
가느다란 어깨끈이 달린 피노키오 런닝구는
손바닥만한 분홍색 팬티와 한 조 되어
나란히 손잡고 빙글빙글 돌고
체크무늬 사각팬티는
초록색 수건과 허리 꼭 껴안고
휘엉휘엉 회전목마를 탄다
지난가을 해운대 아쿠아리움에서 본
물고기들의 춤이 저러했던가
땟국물 쪽 빠진 마알간 수족관에서
지느러미를 한껏 흔들어대는 것이
참 싱그럽기도 하다
*출처: 박영희 시집 『즐거운 세탁』, 애지, 2007.
*약력: 1962년 전남 무안 출생, 중·고등검정고시, 부산대학교에서 7년간 도강(문학, 철학, 사회학, 가정학 등).
회월 박영희(1901~?, 6.25 때 납북) 시인과 동명이인.
‘즐거운 세탁’이라는 시제와 시인의 이름이 언뜻 여성으로 착각하기 쉽다.
시인은 남성으로 그의 일생을 돌아다보면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아마 시인은 세탁뿐만 아니라 부엌일과 집 안 청소까지도 아내를 도왔으리라.
아니 도운 것이 아니라 네 일 내 일을 가리지 않고 아내와 함께 하였으리라.
10월 12일 출석부에 소개한 시, ‘아내의 브래지어’만 보더라도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시인은 돌아가는 세탁기 안을 들여다보며 수족관 속의 물고기들을 떠올렸다.
이 어찌 즐거운 세탁이 아닐 수 있으랴.
*참고
‘런닝구’는 ‘러닝셔츠(running shirts)’의 비표준어이다.
‘휘엉휘엉’은 전남 방언으로 회전목마가 돌아가는 모양을 나타낸 것 같다.
‘마알간’은 '말갛다(말간)'의 뜻으로 시적 표현이다.
아내의 브래지어 / 박영희
누구나 한번쯤
브래지어 호크 풀어보았겠지
그래, 사랑을 해본 놈이라면
풀었던 호크 채워도 봤겠지
하지만 그녀의 브래지어 빨아본 사람
몇이나 될까, 나 오늘 아침에
아내의 브래지어 빨면서 이런 생각해보았다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 일으켜 세우고자 애썼을
아내 생각하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남자도 때로는 눈물로 아내의 슬픔을 빠는 것이다
이처럼 아내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동굴처럼 웅크리고 산 것을
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는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나 오늘 아침에
피죤 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렇게라도 향기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출처: 빛나는 세상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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