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표절 / 정끝별
난 이제 바람을 표절할래
잘못 이름 붙여진 뿔새를 표절할래
심심해 건들거리는 저 장다리꽃을 표절할래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이 싱싱한 아침 냄새를 표절할래
앙다문 씨앗의 침묵을
낙엽의 기미를 알아차린 아직 푸른 잎맥의 숨소리를
구르다 멈춘 바닥에서부터 썩어드는 자두의 무른 살을
그래, 본 적 없는
세상을 향해 달리는 화살의 그림자들을 표절할래
진동하는 용수철처럼 쪼아대는 딱따구리의 격렬한 사랑을 표절할래
허공에 정지한 별의 생을 떠받치고 선
저 꽃 한 송이가 감당했던 모종의 대역사와
어둠과 빛의 고비에서
나를 눈뜨게 하는 당신의 새벽 노래를
최초의 목격자가 되어 표절할래
풀리지 않는, 지구라는 슬픔의 매듭을 베껴 쓰는
불굴의 표절작가가 될래
다다다 나무에 구멍을 내듯 자판기를 두드리며
백지(白紙)의 당신 몸을 통과할래
첫 나뭇가지처럼 바람에 길을 열며
조금은 글썽이는 미래라는 단어를
당신도 나도 하늘도 모르게 전면 표절할래
자, 이제부터 전면전이야
*출처: 정끝별 시집 『와락』, 창비, 2008.
*약력: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이화여자대학교교수.
음악이든 문학이든 표절 문제가 심심치 않게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다.
하지만 표절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라고 화자는 말한다.
그것은 바로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연을 표절하는 것이다.
물론 정확히 말한다면 표절이라기보다는 시의 생명인 묘사이다.
묘사란 어떤 대상이나 사물, 현상 따위를 언어로 서술하거나 그림을 그려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결국 시인은 우주에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을 표절하는 것에 전면전을 펼치는 것이다.
*참고
‘뿔새’는 조류인 ‘새’가 아니고, 해가 뜨거나 지려고 할 때에 하늘이 햇빛을 받아 붉게 보이는 현상인 ‘노을’의 방언(경북).
*출처: 빛나는 세상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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