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한솥밥 / 문성해

믈헐다 2022. 9. 5. 00:09

한솥밥 / 문성해

 

기껏 싸준 도시락을 남편은 가끔씩 산에다 놓아준다

산새들이 와서 먹고 너구리가 와서 먹는다는 도시락

 

애써 싸준 것을 아깝게 왜 버리냐

핀잔을 주다가

내가 차려준 밥상을 손톱만 한 위장 속에 그득 담고

하늘을 나는 새들을 생각한다

 

내가 몇 시간이고 불리고 익혀서 해준 밥이

날갯죽지 근육이 되고

새끼들 적실 너구리 젖이 된다는 생각이

밥물처럼 번지는 이 밤

 

은하수 물결이 잔잔히 고이는

어둠 아래

둥그런 등 맞대고

나누는 한솥밥이 다디달다

 

*출처: 문성해 시집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문학동네, 2017.

*약력: 1963년 경북 문경 출생,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누구에게나 한두 번쯤은 잊을 수 없는 밥이 생각날 때가 있을 것이다.

아플 때 누군가가 쑨 죽 한 그릇, 배고플 때 대접받은 국밥 한 그릇,

무엇보다 어머니의 밥상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이 시에서도 밥 한 끼가 밥 이상의 크나큰 의미가 되었다.

화자는 아내가 정성스럽게 싼 도시락을 산의 들짐승과 날짐승들에게 헌정하였다.

그것은 이리저리 나뉘어 저 몸의 피가 되고 이 몸의 젖이 되었다.

도시락을 싼 이와 도시락을 털고 온 이의 마음이 합쳐 여러 생명을 살렸지 않은가.

 

*참고

한솥밥’, ‘한솥엣밥’, ‘한가맛밥은 같은 솥에서 푼 밥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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