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솥밥 / 문성해
기껏 싸준 도시락을 남편은 가끔씩 산에다 놓아준다
산새들이 와서 먹고 너구리가 와서 먹는다는 도시락
애써 싸준 것을 아깝게 왜 버리냐
핀잔을 주다가
내가 차려준 밥상을 손톱만 한 위장 속에 그득 담고
하늘을 나는 새들을 생각한다
내가 몇 시간이고 불리고 익혀서 해준 밥이
날갯죽지 근육이 되고
새끼들 적실 너구리 젖이 된다는 생각이
밥물처럼 번지는 이 밤
은하수 물결이 잔잔히 고이는
어둠 아래
둥그런 등 맞대고
나누는 한솥밥이 다디달다
*출처: 문성해 시집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문학동네, 2017.
*약력: 1963년 경북 문경 출생,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누구에게나 한두 번쯤은 잊을 수 없는 밥이 생각날 때가 있을 것이다.
아플 때 누군가가 쑨 죽 한 그릇, 배고플 때 대접받은 국밥 한 그릇,
무엇보다 어머니의 밥상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이 시에서도 밥 한 끼가 밥 이상의 크나큰 의미가 되었다.
화자는 아내가 정성스럽게 싼 도시락을 산의 들짐승과 날짐승들에게 헌정하였다.
그것은 이리저리 나뉘어 저 몸의 피가 되고 이 몸의 젖이 되었다.
도시락을 싼 이와 도시락을 털고 온 이의 마음이 합쳐 여러 생명을 살렸지 않은가.
*참고
‘한솥밥’, ‘한솥엣밥’, ‘한가맛밥’은 같은 솥에서 푼 밥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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