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엔, 샴푸 / 주영헌
어제를 잊고 싶어서
샴푸를 합니다
슬픔이나 이별 따윈 어제에 놔두고 오려 했는데
그것이 잘 안 됩니다
원장님이 나를 보고 지성이라고 합니다
책을 많이 읽지도 않는데
그래 보여요라고 농담을 했는데
샴푸를 잘 써야 한다고
꼼꼼히 문질러줘야
잊어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을 향한 감정만
익숙한 샴푸 향기처럼 몸에 배어서
애꿎은 샴푸만 탓합니다
샤워기 버튼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뜨거운 물이 몸을 흐릅니다
*출처: 주영헌 시집 『당신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걷는사람, 2020.
*약력: 1973년 충북 보은 출생,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피부과 의사가 말하는 지성(脂性)을 지성(知性)으로 은유한 시인의 발상이 참 재미있다.
지성(脂性)은 기름기가 많아 잘 마르지 않고 번드르르한 기운이 있는 성질을 말함이고,
지성(知性)은 지적 능력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니 시의 전체 문맥상 묘하게도 잘 어울린다.
당신을 잊고 싶어서 아침마다 샴푸를 쓰지만 당신에게 밴 감정까지는 다 지울 수가 없어
애꿎은 샴푸만 탓하는 화자의 심정이 오롯이 느껴지지 않은가.
“샤워기 버튼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뜨거운 물이 몸을 흐르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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