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다음에 / 박소란

믈헐다 2022. 10. 22. 02:12

다음에 / 박소란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에서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 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보다 먼저 다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출처: 박소란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 창비, 2015.

*약력: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남 마산에서 성장,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문학수첩으로 등단.

 

(이미지 사진은 다음 시사저널, 뉴스뱅크, 2017. 2. 18.)

 

'다음에'라는 이 말이 주는 느낌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의미 그대로 나중에 할 수 있으면 하자라는 뜻이니,

이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기약이 없는 막연한 날이다.

누구나 이 말이 주는 허무함을 한 번씩은 겪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화자처럼 이 말을 자꾸 들으면 서글퍼질 수밖에 없다.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를 하고,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기약도 모르면서 당신에게로 향하는 화자의 말에 가슴이 답답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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