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 박소란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에서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 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보다 먼저 다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출처: 박소란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 창비, 2015.
*약력: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남 마산에서 성장,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문학수첩』으로 등단.
'다음에'라는 이 말이 주는 느낌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의미 그대로 나중에 할 수 있으면 하자라는 뜻이니,
이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기약이 없는 막연한 날이다.
누구나 이 말이 주는 허무함을 한 번씩은 겪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화자처럼 이 말을 자꾸 들으면 서글퍼질 수밖에 없다.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를 하고,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기약도 모르면서 당신에게로 향하는 화자의 말에 가슴이 답답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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