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가을 편지 / 최하림

믈헐다 2022. 10. 29. 01:46

가을 편지 / 최하림

 

그대가 한길에 서 있는 것은 그곳으로

가을이 한꺼번에 떠들썩하게 빠져나가고 있다고

나에게 말해 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대가 역두(驛頭)에 서 있다든지

빌딩 아래로 간다든지

우체국으로 가는 것도

수사가 다르긴 하되 유사한 뜻이 되겠습니다

날마다 세상에는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고

바람과 햇빛이 반복해서 지나가고

보이지 않게 시간들이 무량으로 흘러갑니다

그대는 시간 위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대에게 나는 지금 결정의 편지를 써야 합니다

결정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시간 위에 떠 있는 우리는 도무지 시간의 내용을

알 수 없으니 결정의 내용 또한 알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

 

*‘최하림 시 전집’에 수록된 시와는 행이 다름을 밝힙니다.

 

*출처: 최하림 시 전집, 문학과지성사, 2020.

*약력: 1939년 전남 목포 출생, 1964<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2010년 작고.

 

 

유독 가을이면 떠나는 이들이 많다고 느낄까.

이 시에서도 그렇다.

한길에 서있는 그대가 어디론가 빠져나가기 위한 모습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역 앞에 서 있는 것도, 빌딩 아래로 가는 것도, 우체국으로 가는 것도 그런 그대이다.

분주히 움직이는 흔한 일상적인 모습이지만 화자는 모두가 떠나는 그대들로 보인다.

결국 시의 말미에서는 인연을 떠나보내는 일에 결정의 편지를 써야 한다지만,

그 결정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고 화두를 던진다.

 

*참고

'역두(驛頭)'는 역의 앞쪽으로 '역전(驛前)'과 동의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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