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첫눈 / 허은실

믈헐다 2023. 1. 9. 01:10

첫눈 / 허은실

 

곡기를 끊고

누운 사람처럼

대지는 속을 비워가고

 

바람이

그 꺼칠한 얼굴을

쓸어본다

 

돌아누운 등 뒤에

오래 앉았는 이가 있었다

 

아― 해봐요 응?

마른 입술에

떠넣어주던

흰죽

 

세상에는 이런 것이 아직 있다

 

*출처: 허은실 시집 회복기, 문학동네, 2022.

*약력: 1975년 강원도 홍천 출생, 서울시립대학교 국문과 졸업, 라디오 프로그램 작가 활동.

 

 

식물이나 동물은 생존을 위해 활동을 최소화하거나 아예 겨울잠을 잔다.

그것이 마치 "곡기를 끊고 / 누운 사람”"같이 생기를 잃은 것 같지만

실상은 겨울이 지나지 않고 어찌 봄이 오랴, 자연의 섭리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속이 빈 대지가 안타까워 첫눈을 흰죽에 대비하여 떠먹인다.

"세상에는 이런 것이 아직 있다"

첫눈은 상서로운 눈이니 복되고 길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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