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역꾸역 / 박상천
김치냉장고 맨 아래 넣어두었던
마지막 김치 포기를 정리했습니다
당신과 내가 농사지은 무와 배추로 담근 김치지요.
그러니까 벌써 두 해를 넘긴 김치네요.
당신이 담가놓은 김치가
늘 거기 있음에 안심이 되었기에
그냥 거기 두고 있었습니다.
그냥 거기 두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언제까지 거기 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오늘은 마지막 남은 김치를 꺼내 찌개를 끓였습니다.
딸아이와 나는 저녁상을 차려
김치찌개를 가운데 두고 밥을 먹었습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거기 둘 걸,
정리하지 말 걸,
자꾸만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곤 꾸역꾸역이라는 말이
어떤 모습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출처: 박상천 시집 『그녀를 그리다』, 나무발전소, 2022.
*약력: 1955년 전남 여수 출생,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역임.
아내가 살아생전에 담근 김치는 보관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나
아무리 아껴먹어도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딸아이와 나는 저녁상을 차려 / 김치찌개를 가운데 두고 밥을 먹었습니다. /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엄마 같은 김치찌개를 사이에 둔 부녀의 마음은 어떠할까.
"그냥 거기 둘 걸, / 정리하지 말 걸, / 자꾸만 후회가 되었습니다"
부부 중 어느 한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남겨진 시간을 어찌 견딜까.
어떻게든 살아낼 수는 있겠지만 말 그대로 꾸역꾸역 살 것이지 않겠는가.
'빛나는세상 > 출석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뇌물수수 조사 축소 / 주경림 (0) | 2023.01.12 |
---|---|
햇살 택배 / 김선태 (0) | 2023.01.11 |
밥그릇과 무덤 / 김선태 (0) | 2023.01.09 |
첫눈 / 허은실 (0) | 2023.01.09 |
북어책을 읽다 / 노준옥 (1) | 2023.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