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꾸역꾸역 / 박상천

믈헐다 2023. 1. 10. 00:19

꾸역꾸역 / 박상천

 

김치냉장고 맨 아래 넣어두었던

마지막 김치 포기를 정리했습니다

당신과 내가 농사지은 무와 배추로 담근 김치지요.

그러니까 벌써 두 해를 넘긴 김치네요.

 

당신이 담가놓은 김치가

늘 거기 있음에 안심이 되었기에

그냥 거기 두고 있었습니다.

그냥 거기 두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언제까지 거기 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오늘은 마지막 남은 김치를 꺼내 찌개를 끓였습니다.

 

딸아이와 나는 저녁상을 차려

김치찌개를 가운데 두고 밥을 먹었습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거기 둘 걸,

정리하지 말 걸,

자꾸만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곤 꾸역꾸역이라는 말이

어떤 모습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출처: 박상천 시집 그녀를 그리다, 나무발전소, 2022.

*약력: 1955년 전남 여수 출생,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역임.

 

 

아내가 살아생전에 담근 김치는 보관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나

아무리 아껴먹어도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딸아이와 나는 저녁상을 차려 / 김치찌개를 가운데 두고 밥을 먹었습니다. /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엄마 같은 김치찌개를 사이에 둔 부녀의 마음은 어떠할까.

"그냥 거기 둘 걸, / 정리하지 말 걸, / 자꾸만 후회가 되었습니다"

부부 중 어느 한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남겨진 시간을 어찌 견딜까.

어떻게든 살아낼 수는 있겠지만 말 그대로 꾸역꾸역 살 것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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