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나도 모르게 네 곁에 / 김율도

믈헐다 2023. 1. 30. 02:13

나도 모르게 네 곁에 / 김율도

 

나도 모르게 쳐다본다

네 눈동자 속에 내가 보인다

나도 모르게 말을 건다

그 말은 아무 의미 없는 말이다

의미 없는 말에 이끌려 네가 손을 내민다

 

나도 모르게 글을 쓴다

그 글의 주제는 나고 소재는 너다

나도 모르게 그림을 그린다

그 그림은 네 얼굴이다

 

바람이 분다

나도 모르게 바람을 막아준다

나도 모르게 네 이름 옆에 내 이름을 쓴다

나도 모르게 세상이 너 하나로 좁아진다

 

나도 모르게 네 곁에 선다

나도 모르게 네 주변을 맴돈다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진짜 나도 모르게 하는 것이

진짜

 

*출처: 김율도 시집 그대에게 가는 의미, 율도국, 2019.

*약력: 1965년 서울 출생, 서울 대광고등학교, 서울예술대학 광고창작과 졸업.

 

 

의례적인 인사말인 인사치레가 있다.

그 말까지 빠뜨린다면 진짜로 불손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가령 누군가에게 어떤 대접을 받고도 시치미를 떼듯 입을 닦는 경우를 말함이다.

고마움의 표시로 건네는 말도 의식과 무의식이 선명히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인사치레가 의식적이라면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는 말은 무의식적이라 할 수 있다.

화자가 말하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하는 말과 행위가 진짜라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네 곁을 헤매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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