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빗살무늬 / 허연
당신이 오라 해서 숲에 들어왔습니다.
이끼 위에 남은 당신의 발자국과
자작나무 가지에 걸린 당신의 머리칼을 따라왔습니다.
하지만
잊힌 무덤 몇 개
잡초에 파묻힌 곳에서
당신을 잃었습니다.
무섭고 신비스럽습니다.
자작나무가 슬프게 떠는 숲
빗살무늬 앞에 섰습니다.
죄 많은 빛과 어둠
무늬가 된 세월들
사선으로 내려오던 참회가
어느새 모여 바람이 되고
그 사이로 잘게 찢겨 들어온 기억들이
연서들로 쌓이는 동안
당신의 이름은 흩어집니다.
사선으로 들어온 상처들을 다시 살펴보지만
나를 호명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 숲 어딘가에서
저 사선으로 내리꽂는 차가운 빗살무늬로 서 있겠지요.
빗금처럼 서 있겠지요.
당신에게 묻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전생이었나요?
*출처: 허연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사, 2020.
*약력: 1966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석사 학위, 추계예술대학교 박사 학위.
자작나무는 나무껍질이 하얗고 빗살처럼 사선의 무늬가 쭉쭉 나 있고,
키가 전봇대처럼 하늘로 쭉 뻗었으니 바람 부는 날이면 마치 슬프게 우는 듯한 소리를 낸다.
화자는 이끼 위에 남은 당신의 발자국과 자작나무 가지에 걸린 당신의 머리칼을 따라갔다.
하지만 잊힌 무덤 몇 개와 잡초에 파묻힌 곳에서 당신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당신이 사는 숲은 죽은 자들의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산 자와 죽은 자와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서까지 당신에게 묻는다.
어쩌면 당신은 나의 전생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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