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당신의 빗살무늬 / 허연

믈헐다 2023. 4. 8. 04:17

당신의 빗살무늬 / 허연

 

당신이 오라 해서 숲에 들어왔습니다.

이끼 위에 남은 당신의 발자국과

자작나무 가지에 걸린 당신의 머리칼을 따라왔습니다.

하지만

잊힌 무덤 몇 개

잡초에 파묻힌 곳에서

당신을 잃었습니다.

 

무섭고 신비스럽습니다.

자작나무가 슬프게 떠는 숲

빗살무늬 앞에 섰습니다.

죄 많은 빛과 어둠

무늬가 된 세월들

사선으로 내려오던 참회가

어느새 모여 바람이 되고

그 사이로 잘게 찢겨 들어온 기억들이

연서들로 쌓이는 동안

당신의 이름은 흩어집니다.

사선으로 들어온 상처들을 다시 살펴보지만

나를 호명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 숲 어딘가에서

저 사선으로 내리꽂는 차가운 빗살무늬로 서 있겠지요.

빗금처럼 서 있겠지요.

 

당신에게 묻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전생이었나요?

 

*출처: 허연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사, 2020.

*약력: 1966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석사 학위, 추계예술대학교 박사 학위.

 

 

자작나무는 나무껍질이 하얗고 빗살처럼 사선의 무늬가 쭉쭉 나 있고,

키가 전봇대처럼 하늘로 쭉 뻗었으니 바람 부는 날이면 마치 슬프게 우는 듯한 소리를 낸다.

화자는 이끼 위에 남은 당신의 발자국과 자작나무 가지에 걸린 당신의 머리칼을 따라갔다.

하지만 잊힌 무덤 몇 개와 잡초에 파묻힌 곳에서 당신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당신이 사는 숲은 죽은 자들의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산 자와 죽은 자와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서까지 당신에게 묻는다.

어쩌면 당신은 나의 전생이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