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 가는 지구를 굴리며 / 김종경
오일장마다
‘믿음천국, 불신지옥’을 부르짖는
붉은 조끼들이
천국행 암표를 팔고 있다
십자가를 등에 진 종말론자는
옆구리에 스피커를 매단 채
그분이 너희 죄를 사했노라고,
여장 남자 각설이는
호박엿은 구원이 아니라
만 원에 네 개라며,
이미 구원을 받은 듯
찬송가보다 더 크게
뽕짝을 불러댔다
누런 푸들을 앞에 태운
노인의 전동휠체어는
호박엿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서둘러 귀가하고
땅바닥을 끌며
찬송가를 부르는 박물 장수에게
천 원짜리 면봉과
편지 봉투 한 묶음을 사는
사람들,
그가 애벌레를 닮았다며
그림자마저
조심스레 비껴가고
그는 오늘도 온몸으로
저물어 가는 지구를 굴리며
노을 밖 세상을
구원 중이다
*출처: 김종경 시집 『저물어 가는 지구를 굴리며』, 별꽃, 2023.
*약력: 경기도 용인 출생, 동국대 언론학 석사와 단국대 문학박사 대학원 졸업.
종말론자의 스피커 소리, 각설이의 노랫소리, 땅바닥을 끄는 박물 장수의
찬송가 소리 따위는 여느 시골 오일장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사실 오일장을 찾는 것은 볼거리와 먹을거리뿐만 아니라 반가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같이 날씨가 좋은 봄날이면 특별히 살 것이 없더라도 장을 나서게 된다.
오일장은 저물어가는 지구를 굴리듯 노을 밖 세상을 구원 중인 사람들과 함께 우리의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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