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저물어 가는 지구를 굴리며 / 김종경

믈헐다 2023. 4. 9. 02:58

저물어 가는 지구를 굴리며 / 김종경

 

오일장마다

‘믿음천국, 불신지옥’을 부르짖는

붉은 조끼들이

천국행 암표를 팔고 있다

 

십자가를 등에 진 종말론자는

옆구리에 스피커를 매단 채

그분이 너희 죄를 사했노라고,

 

여장 남자 각설이는

호박엿은 구원이 아니라

만 원에 네 개라며,

이미 구원을 받은 듯

찬송가보다 더 크게

뽕짝을 불러댔다

 

누런 푸들을 앞에 태운

노인의 전동휠체어는

호박엿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서둘러 귀가하고

 

땅바닥을 끌며

찬송가를 부르는 박물 장수에게

천 원짜리 면봉과

편지 봉투 한 묶음을 사는

사람들,

그가 애벌레를 닮았다며

그림자마저

조심스레 비껴가고

 

그는 오늘도 온몸으로

저물어 가는 지구를 굴리며

노을 밖 세상을

구원 중이다

 

*출처: 김종경 시집 저물어 가는 지구를 굴리며, 별꽃, 2023.

*약력: 경기도 용인 출생, 동국대 언론학 석사와 단국대 문학박사 대학원 졸업.

 

종말론자의 스피커 소리, 각설이의 노랫소리, 땅바닥을 끄는 박물 장수의

찬송가 소리 따위는 여느 시골 오일장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사실 오일장을 찾는 것은 볼거리와 먹을거리뿐만 아니라 반가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같이 날씨가 좋은 봄날이면 특별히 살 것이 없더라도 장을 나서게 된다.

오일장은 저물어가는 지구를 굴리듯 노을 밖 세상을 구원 중인 사람들과 함께 우리의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니 말이다.

'빛나는세상 > 출석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폭포 / 오세영  (0) 2023.04.10
눈물 예찬 / 이해인  (0) 2023.04.09
당신의 빗살무늬 / 허연  (0) 2023.04.08
흙인 나를 밟아다오 / 이건청  (0) 2023.04.06
그땐 왜 몰랐을까 / 정채봉  (0) 2023.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