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 이향지
나무 끝까지 올라갔던 초록이
다 내려온 후에야
길 건너편 창이 보인다
나뭇잎에 가려서 안 보이던 창 안에
불이 켜지고
불이 꺼지고
미소 띤 얼굴이 오래 켜지기도 한다
나무터널을 몇 십 분 걸어도 안 보이던 사람들이
나뭇잎을 따라서 모두 땅으로 내려왔나 보다
오늘 마지막 낙엽을 실은 작은 트럭이 떠났다
나도 내 창문의 나뭇잎을 걷어 낸다
겨울이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출처: 이향지 시집 『햇살 통조림』, 천년의시작, 2014.
*약력: 1942년 경남 통영 출생, 부산대학교 졸업.
시인은 나뭇가지 사이로 길 건너편 창이 보이기 때문에 겨울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창 안에서 불이 켜지고 꺼지는 광경을 보는 기쁨으로 미소 띤 얼굴이 오래 켜진다고 한다.
하늘을 뒤덮은 나무 터널 길에도 보이지 않던 사람들까지 보이니 더 그렇게 생각한다.
마지막 낙엽을 실은 트럭이 떠나면 겨울이 온다는 것을 알기에
창문의 나뭇잎을 걷어 내면서도 겨울이 오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가을이 떠나는 것이 마냥 외롭고 슬프다고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겨울을 나지 않고는 희망찬 새봄을 맞이할 수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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