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겨울이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 이향지

믈헐다 2022. 11. 21. 22:45

겨울이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 이향지

 

나무 끝까지 올라갔던 초록이

다 내려온 후에야

길 건너편 창이 보인다

 

나뭇잎에 가려서 안 보이던 창 안에

불이 켜지고

불이 꺼지고

미소 띤 얼굴이 오래 켜지기도 한다

 

나무터널을 몇 십 분 걸어도 안 보이던 사람들이

나뭇잎을 따라서 모두 땅으로 내려왔나 보다

 

오늘 마지막 낙엽을 실은 작은 트럭이 떠났다

 

나도 내 창문의 나뭇잎을 걷어 낸다

 

겨울이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출처: 이향지 시집 햇살 통조림, 천년의시작, 2014.

*약력: 1942년 경남 통영 출생, 부산대학교 졸업.

 

시인은 나뭇가지 사이로 길 건너편 창이 보이기 때문에 겨울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창 안에서 불이 켜지고 꺼지는 광경을 보는 기쁨으로 미소 띤 얼굴이 오래 켜진다고 한다.

하늘을 뒤덮은 나무 터널 길에도 보이지 않던 사람들까지 보이니 더 그렇게 생각한다.

마지막 낙엽을 실은 트럭이 떠나면 겨울이 온다는 것을 알기에 

창문의 나뭇잎을 걷어 내면서도 겨울이 오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가을이 떠나는 것이 마냥 외롭고 슬프다고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겨울을 나지 않고는 희망찬 새봄을 맞이할 수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