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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김남조

편지 /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출처: 김남조 시집 『가난한 이름에게』, 미래사, 2002. *약력: 1927년 경북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 졸업, 마산고교, 이화여고 교사와 숙명여대 교수를 지냈다. ‘모윤숙’, ‘노천명’의 뒤를 잇는 1960년대 대표 여류시인으로 꼽힌다.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했음 직하는 애틋한 그리움이 묻어나..

별의 생애 / 이동순

별의 생애 / 이동순 바람 속에 태어난 저 어린 별은 제 어미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오늘도 캄캄한 우주 벌판에서 외롭게 반짝인다 어린 별이 땅 위의 가난한 나라 아이들과 밤새도록 서로 눈 맞추고 용기와 희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신의 한 생을 살아온 늙은 별은 흐뭇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다 우주의 한쪽 구석에서 혼자 조용한 임종을 맞이한다 자욱한 눈보라 속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서 영영 되돌아오지 않는 저 북극 에스키모 노인처럼 *출처: 이동순 시집 『그대가 별이라면』, 시선사, 2004. *약력: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영남대학교 교수. 바람 속에 태어난 어린별. 우주의 한쪽 구석에서 혼자 조용히 임종을 맞이하는 늙은 별. 생성과 소멸의 노래이다. 지천명의 시인이 들..

해장아파트 / 전윤호

해장아파트 / 전윤호 평생 취해 살다 속 버리고 이사온 동네 휘청거리는 안개 자욱하고 푸른 소주병 굴러다니는 바람 이제 술을 끊어야겠네 내 속을 다 들여다봤으니 취하지 않아도 잠들고 한밤에 목마르지 않더군 이유 없이 시비 걸고 뒤에서 욕하지 않는 늙고 지친 주민들끼리 승강기 기다리는 일 층에서 따뜻한 인사 나누네 *출처: 전윤호 시집 『슬픔도 깊으면 힘이 세진다』, 북인, 2020. *약력: 1964년 강원도 정선 출생, 동국대학교 사학과 졸업, 199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아파트 이름이 ‘개나리, 장미, 목련, 비둘기, 무지개, 행복, 복지’ 따위의 부르기 좋고 외우기 쉬운 것이 점차 어려운 이름으로 바뀌는 이유는 뭘까. 시어머니 찾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우스갯소리도 있고, 좀 있어 보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