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애매한 문장은 죄가 되지 못한다 / 이화은

믈헐다 2022. 11. 24. 00:20

애매한 문장은 죄가 되지 못한다 / 이화은

 

내 죄는 도무지 문장이 되지 않는다

한껏 한 문장을 만들고 나면

주어가 실종되었거나 동사가 지나치게 과격하다

따끔따끔 압정 같은 쉼표가 행마다 행간마다

어지럽게 널려 있다

 

​제대로 뜸이 들지 않은 밥상을

입맛이 까다로운 신에게 바칠 수는 없다

문장은 짧을수록 좋다고,

 

죄는 시가 아니다

가끔 소설을 쓰는 이도 있지만

내 신의 취향은 다큐 쪽이다

 

죄에 목마른 사제가 홀로 지키는 고해소 앞을

오늘도 문장이 되지 못한 죄인들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간다, 홀깃

 

고해소의 불빛을 훔쳐보는 이도 있으나

틀린 문법은 십계명에 들지 못한다

 

​죄지은과, 죄지은 듯의 차이에 대해

사람들은 크게 따지지 않는다

 

*출처: 이화은 시집 절반의 입술, 파란, 2021.

*약력: 1947년 경북 경산 출생(), 인천교육대학교와 동국대 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사진 출처: 명동성당 고해성사 자료실)

사람들은 시에서 실종된 주어, 과격한 동사, 어지러운 쉼표, 틀린 문법 따위를 

크게 따지지 않을뿐더러 그것들이 십계명에 들지 못하니 죄가 되지 않는다고 시인은 말한다.

화자의 신은 다큐 쪽, 즉 있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취향이다.

결국 시적 상상력이란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그러나 세상은 늘 보는 대로 늘 하는 대로 늘 생각하는 대로 하는 것은 재미가 없지 않을까.

시를 읽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는 애매하기 때문에 시인의 의도와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인의 손에서 떠나는 순간 시는 오롯이 읽는 이의 몫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