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826

편지 / 김남조

편지 /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출처: 김남조 시집 『가난한 이름에게』, 미래사, 2002. *약력: 1927년 경북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 졸업, 마산고교, 이화여고 교사와 숙명여대 교수를 지냈다. ‘모윤숙’, ‘노천명’의 뒤를 잇는 1960년대 대표 여류시인으로 꼽힌다.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했음 직하는 애틋한 그리움이 묻어나..

별의 생애 / 이동순

별의 생애 / 이동순 바람 속에 태어난 저 어린 별은 제 어미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오늘도 캄캄한 우주 벌판에서 외롭게 반짝인다 어린 별이 땅 위의 가난한 나라 아이들과 밤새도록 서로 눈 맞추고 용기와 희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신의 한 생을 살아온 늙은 별은 흐뭇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다 우주의 한쪽 구석에서 혼자 조용한 임종을 맞이한다 자욱한 눈보라 속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서 영영 되돌아오지 않는 저 북극 에스키모 노인처럼 *출처: 이동순 시집 『그대가 별이라면』, 시선사, 2004. *약력: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영남대학교 교수. 바람 속에 태어난 어린별. 우주의 한쪽 구석에서 혼자 조용히 임종을 맞이하는 늙은 별. 생성과 소멸의 노래이다. 지천명의 시인이 들..

해장아파트 / 전윤호

해장아파트 / 전윤호 평생 취해 살다 속 버리고 이사온 동네 휘청거리는 안개 자욱하고 푸른 소주병 굴러다니는 바람 이제 술을 끊어야겠네 내 속을 다 들여다봤으니 취하지 않아도 잠들고 한밤에 목마르지 않더군 이유 없이 시비 걸고 뒤에서 욕하지 않는 늙고 지친 주민들끼리 승강기 기다리는 일 층에서 따뜻한 인사 나누네 *출처: 전윤호 시집 『슬픔도 깊으면 힘이 세진다』, 북인, 2020. *약력: 1964년 강원도 정선 출생, 동국대학교 사학과 졸업, 199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아파트 이름이 ‘개나리, 장미, 목련, 비둘기, 무지개, 행복, 복지’ 따위의 부르기 좋고 외우기 쉬운 것이 점차 어려운 이름으로 바뀌는 이유는 뭘까. 시어머니 찾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우스갯소리도 있고, 좀 있어 보이기..

고운 밥 / 전윤호

고운 밥 / 전윤호 신도 동네마다 이름이 달라 다르게 부르면 해코지하는데 밥은 사투리가 없다 이 땅 어디나 밥이다 함께하면 식구가 되고 혼자 먹어도 힘이 되는 밥 어떤 그릇을 놓고 어떤 수저를 펼쳐놓든 김이 오르는 밥 앞에 모두 평등하니 이보다 귀한 이름이 더 있겠나 논이 부족한 제주도에서 쌀밥은 아름다워 곤밥이라 부른다니 사랑하는 사람이여 우리 밥이나 함께하자 *출처: 전윤호 시집 『슬픔도 깊으면 힘이 세진다』, 북인, 2020. *약력: 1964년 강원도 정선 출생, 동국대학교 사학과 졸업, 199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우리는 흔히 ‘밥이 보약이다’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 ‘고운 밥’처럼 밥 앞에 형용사를 붙이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삼시 세끼가 늘 ‘예쁜 밥’, ‘아름다운 밥’, ‘착한 밥’이었..

깃털이 죽지 않고 / 김일영

깃털이 죽지 않고 / 김일영 간절히 손을 내밀지만 저 주검을 끌어당겨줄 바람은 오지 않는다 타이어는 짓밟힌 새를 거듭 짓밟고 가지만 솜털 깊숙이 기억된 항로가 바람을 붙잡는다 아스팔트를 뽑아 일으키며 날아갈 바람의 씨앗, 깃털이 죽지 않고 손을 든다 *출처: 김일영 시집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실천문학사, 2009. *약력: 1970년 전남 완도 출생,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졸업. 200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타이어에 짓밟힌 새는 주검에 지나지 않지만, 시인의 상상력은 보잘 것 없는 솜털 하나 속에서 자유롭게 비상하던 새의 항로를 더듬는다. 깃털이 “아스팔트를 뽑아 일으키며” 날아간다는 역동적 상상력이 작동하여 죽음 속에서 죽음 너머를 꿈꾸는 새로운 ‘씨앗’의 역설을 ..

시집과 그것을 하다 / 김왕노

시집과 그것을 하다 / 김왕노 시집은 요염하게 삼베옷을 입은 여인처럼 온다. 곡비처럼 온다. 두 번째 페이지 하얀 속살에는 내 이름을 문신으로 새기고 온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깊어가는 밀애 우리 사랑 오르가슴에 닿았는지 멀리서 달려오는 까마득함 시집이 온 다음 날은 무리했는지 걸을 때마다 휘청거린다. *출처: 김왕노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천년의시작, 2019. *약력: 1957년 경북 포항 출생, 아주대학교 대학원 석사,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꿈의 체인점’으로 등단. “시집이 온 다음 날은 무리했는지 / 걸을 때마다 휘청거린다”니, 시인이 시집을 출간하여 출판사로부터 시집을 받은 심경을 사랑 행위와 연결시켰다. “시집과 그것을 한” 행위는 첫날밤을 치룬 신랑 신부처럼 말이다..

폭설(暴雪) / 오탁번

폭설(暴雪) /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

배추는 다섯 번을 죽어서야 김치가 된다 / 김삼환

배추는 다섯 번을 죽어서야 김치가 된다 / 김삼환 순식간에 뽑혀 나와 부르르 떠는 배추 그렇다 분수처럼 절정에서 꺾이는 것 전율은 솟구친 몸이 떨어질 때 오는 거다 증거는 충분하지, 두 쪽으로 배를 갈라 차곡차곡 쌓아 온 이력들을 흔드는 것 오로지 결기(潔己)하나로 한 번 외쳐 보는 거다 소금기가 구석구석 온 몸으로 스며들 때 누구인들 한 번쯤 이렇게 푹 젖다 보면 사나흘 생각이 깊어 돌아갈 수 없는 거다 고추 마늘 온갖 양념을 한 통속에 비벼서 덥고 춥고 맵고 짠맛을 한꺼번에 겪는 것 세상의 눈치 살피며 풀 죽을 수 있는 거다 입 안에서 씹힐 때 마지막 숨 거두며 다섯 번을 죽어서야 맛을 내는 배추처럼 몇 번을 까무러쳐야 시 한 편이 되는 거다 *출처: Daum & NAVER. *약력: 1958년 전남..

탁! / 최재경

탁! / 최재경 달랑 두 노인네 사시는 오두막에 겁도 없이 하얀 눈이 폭폭 쌓여갑니다 초저녁잠이 깬 노인네들 얼굴만 내밀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안노인네 가슴으로 손이 슬그머니 갑니다 밖에 누가 오는 소리 불을 껐다가 다시 켜보고는, 이 시간에 누가 올까나?, 그러다가는 마당에 나가 개운하게 오줌을 갈기다가 "별일이네! 이 나이에" 추적거리고 들어와 잠을 청해도 그냥 자려다가 손이 또 무안하여 더듬다가 “탁!” “왜이랴 이냥반이 누가 오면 어짤라구?” · · · 아침이 오려면 아직 멀었고 마당에 눈은 사정없이 푹푹 쌓여가고. *출처: Daum & NAVER. *약력: 1955년 대전 출생, 2006년 『문학세계』로 등단. 눈이 폭폭 쌓여가고 푹푹 쌓여가니, 오두막살이 노인네는 잠이 달아났다. 아내의 가..

너 / 권진희

너 / 권진희 ​돌아누운 산등성이 휜 허리도 동그랗게 마주 누운 묵뫼도 모두 너구나. 마주 누워 널 껴안아도 네 가슴에 입 맞출 수 없는 나는 산 너머에만 있어서 네 쪽으로 지는 저녁 사흘 겨울비에 젖는 마른 나뭇가지 모두 너구나. 온통 너구나. *출처: 권진희 시집 『죽은 물푸레나무에 대한 기억』, 푸른사상사, 2012. *약력: 1967년 대구 출생(男),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석사, 문예창작학과 박사 과정. “산 너머에만 있어서 / 네 쪽으로 지는 저녁”이라니, 화자는 온통 당신 생각뿐이다. 산등성이도 묵뫼도 마른 나뭇가지까지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당신과 연결시키니 말이다. 그런 마음이 첫사랑부터 끝 사랑까지 변함없으면 좋겠지만, 어디 사랑이 그런가. 겨울비에 자꾸 젖다 보면 식어버리니 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