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무화과를 먹는 저녁 / 이성목

믈헐다 2022. 12. 2. 06:00

무화과를 먹는 저녁 / 이성목

 

지난 생에 나는 거기 없는 당신을 기다리는 벌을 받고 울다가 내 안으로 들어와 몸져누운 날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우두커니 서서 육신을 익혀가는 계절, 몽둥이에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엉덩이에 푸른 멍이 번지던 저녁이 있었습니다.

 

한 시절 몸을 탐하느라 나를 잊을 뻔도 했습니다. 아파하려고 꽃이 나에게 왔었다는 것,

 

위독은 병이 아니라 이별의 예각에 숨어 피는 꽃이라는 것조차

 

거기 없는 당신을 기다리다가 끝내 당신 속으로 들어간 마음이 진물처럼 흘러나와 어찌할 수 없을 때,

 

바람은 스스로 지운 꽃냄새를 풍기며 선득하게 나를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없다면 어느 몸이 아프다고 저렇게 큰 잎을 피워내서 뒤척일까요.

 

​ 아무렇게나 태어난 아이들이 골목길로 꿀꺽꿀꺽 뛰어드는 환청, 꽃을 숨기느라 땅이 저물고 하늘이 붉어지는 것을 몰랐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적 없는 꽃냄새가 당신도 없이, 입안에 가득하였습니다.

 

*출처: 이성목 시집 노끈, 애지, 2012.

*약력: 1962년 경북 선산 출생, 제주대학 법학과 졸업, 1996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이 시는 무화과(無花果)를 잘 모르고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말 그대로 꽃이 없는 열매라는 말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꽃 피우지 않고 열리는 열매가 어디 있겠는가.

무화과 꽃은 주머니 모양의 열매 속에 귀히 숨겨져,

수꽃은 위쪽에 암꽃은 아래쪽에 위치하여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화자는 붉은 무화과 꽃처럼 당신을 기다리다가 끝내 당신 속으로 들어가지만

당신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부재중인 사람을 기다리는 게 삶의 전부라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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