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태백산행 / 정희성

믈헐다 2022. 11. 30. 23:40

태백산행 / 정희성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거린다

지가 열일곱 살이야 열아홉 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출처: 정희성 시집 돌아다 보면 문득, 창비, 2008.

*약력: 1945년 경남 창원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태백산 주목)

 

칠십 고개 넘긴 사람에겐 쉰일곱이 참 젊다.

하물며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의 수명을 자랑하는 나무가 보기엔

인간의 나이타령이 엄살처럼 들릴 것이다.

태백산 주목의 눈에야 다들 참 좋은 때로 보일 것이다.

올해 몇 살이 됐든 지금 나이가 '가장 좋을 때'란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제부터라도 마음만은 조로하지 않도록 챙길 일이다.

아내가 볼 땐 쉰일곱 살이 너무 많아 보이고, 노인들의 눈에는 무척이나 젊어 보인다.

유독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고 계집만 /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니

나이 셈법이란 이토록 상대적이지 않은가.

 

*참고

'고개' 중년 이후  단위만큼의 나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니,

'칠십고개' '칠십√고개'로 띄어 적는 것이 바른 표기이다.

'조오흘 때' '좋을 때'의 비표준어로 구어체식 표현이다.

'당골집' '무당집'의 전남 방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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