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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밥 / 전윤호

고운 밥 / 전윤호 신도 동네마다 이름이 달라 다르게 부르면 해코지하는데 밥은 사투리가 없다 이 땅 어디나 밥이다 함께하면 식구가 되고 혼자 먹어도 힘이 되는 밥 어떤 그릇을 놓고 어떤 수저를 펼쳐놓든 김이 오르는 밥 앞에 모두 평등하니 이보다 귀한 이름이 더 있겠나 논이 부족한 제주도에서 쌀밥은 아름다워 곤밥이라 부른다니 사랑하는 사람이여 우리 밥이나 함께하자 *출처: 전윤호 시집 『슬픔도 깊으면 힘이 세진다』, 북인, 2020. *약력: 1964년 강원도 정선 출생, 동국대학교 사학과 졸업, 199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우리는 흔히 ‘밥이 보약이다’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 ‘고운 밥’처럼 밥 앞에 형용사를 붙이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삼시 세끼가 늘 ‘예쁜 밥’, ‘아름다운 밥’, ‘착한 밥’이었..

깃털이 죽지 않고 / 김일영

깃털이 죽지 않고 / 김일영 간절히 손을 내밀지만 저 주검을 끌어당겨줄 바람은 오지 않는다 타이어는 짓밟힌 새를 거듭 짓밟고 가지만 솜털 깊숙이 기억된 항로가 바람을 붙잡는다 아스팔트를 뽑아 일으키며 날아갈 바람의 씨앗, 깃털이 죽지 않고 손을 든다 *출처: 김일영 시집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실천문학사, 2009. *약력: 1970년 전남 완도 출생,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졸업. 200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타이어에 짓밟힌 새는 주검에 지나지 않지만, 시인의 상상력은 보잘 것 없는 솜털 하나 속에서 자유롭게 비상하던 새의 항로를 더듬는다. 깃털이 “아스팔트를 뽑아 일으키며” 날아간다는 역동적 상상력이 작동하여 죽음 속에서 죽음 너머를 꿈꾸는 새로운 ‘씨앗’의 역설을 ..

시집과 그것을 하다 / 김왕노

시집과 그것을 하다 / 김왕노 시집은 요염하게 삼베옷을 입은 여인처럼 온다. 곡비처럼 온다. 두 번째 페이지 하얀 속살에는 내 이름을 문신으로 새기고 온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깊어가는 밀애 우리 사랑 오르가슴에 닿았는지 멀리서 달려오는 까마득함 시집이 온 다음 날은 무리했는지 걸을 때마다 휘청거린다. *출처: 김왕노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천년의시작, 2019. *약력: 1957년 경북 포항 출생, 아주대학교 대학원 석사,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꿈의 체인점’으로 등단. “시집이 온 다음 날은 무리했는지 / 걸을 때마다 휘청거린다”니, 시인이 시집을 출간하여 출판사로부터 시집을 받은 심경을 사랑 행위와 연결시켰다. “시집과 그것을 한” 행위는 첫날밤을 치룬 신랑 신부처럼 말이다..